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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별세]"이병철 반대에 '내돈으로 한다'…반도체의 시작"

“이건희 회장님.”
 

손병두 전 호암재단 이사장,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

 건강을 회복하신 회장님을 이렇게 불러보길 얼마나 기도드렸는지 모릅니다. 매일 새벽 미사 때마다 회장님의 쾌유를 빌어드렸는데 제 기도의 힘이 많이 모자랐나 봅니다.
 
지난 6년간의 긴 투병 생활을 끝내시고 이제 저희 곁을 영영 떠나십니까. 사랑하는 가족들, 삼성 임직원, 친지, 당신을 아끼시는 많은 사람을 뒤로한 채 이렇게 황망히 떠나십니까?
 
막상 회장님이 떠나시고 안 계신다고 생각하니 우리를 버텨주던 큰 성채가 무너진 것 같고 마음은 쓸쓸한 황야에서 석양을 바라보듯 쓸쓸하고 아쉬움으로 가득 찹니다.
손병두

손병두

 
제 인생 여정에서 회장님과 맺었던 인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회장님과의 첫 인연은 제가 중앙일보 기획실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그 뒤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부회장님으로 가까이 모시고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이는 신사생으로 저와 동갑이지만 과묵하면서도 깊은 사고와 내공, 사물에 대한 긴 안목과 통찰력, 일에 대한 무서운 집념, 대범하면서도 섬세하고 자상한 마음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한국 경제를 세계적 경제 강국의 반열에 올리는 데 크게 공헌한 기적의 사람이셨습니다.
 
삼성에서 아무도 반도체를 모르던 시절, 어느 날 하루 서류뭉치를 저에게 주시면서 검토하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반도체 인수 서류였습니다. 저 역시 반도체에 대해 문외한이었기에 국내 전문가를 찾아보고 외국 문헌을 뒤적이며 검토한 결론은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쌀이다’ 였습니다. 회장님이 이병철 회장께 인수를 건의하니 처음엔 말리셨다고 했습니다. 이때 이 회장님이 ‘내 돈으로 인수하겠다’고 해 시작한 것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이병철 회장님과 제가 단둘이 있을 때 세 아들에 대한 평을 하셨습니다. ‘맹희는 예술가가 되었으면 좋았을거고, 창희는 중소기업 정도는 경영할 수 있겠고, 그래도 건희는 큰 기업을 이끌 수 있는 재목이재’ 하시며 이 말을 아무에게도 절대로 하지 말라고 엄명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선대 회장님께서 이건희 회장님을 후계자로 키우시기 위해 엄한 훈련을 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계자가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묵묵히 인내하고 이겨내어 후계자가 되셨습니다.
 
회장이 되신 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시작으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명언을 남기시면서 삼성의 변화와 개혁에 박차를 가하셨습니다. 회장님은 가히 초인적인 노력으로 밖에서 들려오는 온갖 악성 루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달성에 매진하셨습니다.  
 
이건희 회장님.
회장님은, 항시 기업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사업보국의 정신을 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참을성 많은 이 회장님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던 장면은 저희들로 하여금 숙연한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언젠가 이 회장님 초대로 이태원 승지원에서 전경련 회장단 부부 만찬 모임이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먼저 도착해서 인사를 드렸더니 ‘우리는 참 오랜 인연이지요’하시며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때 제 소망은 이 회장님을 전경련 회장님으로 모시고 한국 경제계의 큰 혁신을 이루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전경련 회원사들이 이 회장님을 전경련 회장님으로 모시고자 했지만, 건강상 이유로 고사하시어 모두들 아쉬워했습니다.
 
제가 갑작스럽게 삼성을 떠나게 되자 가족의 생계대책도 마련해주시고, 또 내가 미국 공부하러 갈 때 비자까지도 챙겨주기도 하셨습니다. 이때 보여주신 자상함과 따뜻한 정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삼성을 떠난 지 34년 만에 호암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복귀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저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습니다. 이로써 그동안 제가 가졌던 아쉬움의 응어리를 모두 풀어 주셨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개인적으로 음양으로 베풀어주신 호의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듯한 슬픔이 북받쳐 오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회장님께서 저에게 베푼 은혜가 너무나 크시지만 저는 하나도 갚아드리지 못하고 영영 헤어지게 되다니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지난번 특검으로 회장님이 법정에 서시게 되었을 때 제가 서강대 총장으로서 증인으로 나가서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 증언해 드렸던 일이 다소나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고 스스로 위안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건희 회장님
회장님이 쾌유하시어 반갑게 만나 뵐 수 있으리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기도 속에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제대로 말씀을 나누지 못하고 영면하시게 되어 많은 회한이 있으시겠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든든한 후계자 이재용 부회장을 키워놓으셨으니 후사를 맡기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시옵소서. 그리하여 천국에서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평화의 안식을 누리소서.
 
2020년 10월 손병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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