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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의 퍼스펙티브] 정조 이후를 보수의 시대로 단정하는 건 편협하다

잘못된 좌우 역사 논쟁과 좌파의 오류

김득신 등이 1795년경 그린 ‘화성능행도’ 8폭 병풍 중 일곱 번째 폭인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서울로 돌아오는 임금의 행차 그림).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행차 주변에 백성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정조는 대민 접촉과 민원 해결의 기회로 행차를 활용했다. [중앙포토]

김득신 등이 1795년경 그린 ‘화성능행도’ 8폭 병풍 중 일곱 번째 폭인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서울로 돌아오는 임금의 행차 그림).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행차 주변에 백성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정조는 대민 접촉과 민원 해결의 기회로 행차를 활용했다. [중앙포토]

최근 여권에서 정조대왕에 관한 언급이 잦다. 정조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논문도 몇 편 써본 역사학자로서 반갑기도 하지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정조를 주목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 이후의 역사를 보수의 시대로 단정하여 매도의 대상으로 삼아버린 것은 매우 비 역사학적이어서 걱정스럽다. 좌·우 간에 역사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편식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활을 건 싸움 때문인지 제 편에 속하는 특정 인물을 내세워 그의 치적을 드러내 찬양하다가 정작 역사에서 중시해야 할 시대 흐름 같은 것은 도외시하고 만다. 정조에 대한 평가에 이어 뒷 시대에 대한 부정도 그런 현상의 하나다. 특정 부분만 불거지는 것은 일종의 발암 현상으로, 경계해 마지않아야 한다.
 

최근 여권서 정조를 칭송하며 이후 시대를 수구 보수로 격하
특정 부분만 불거지는 건 일종의 발암 현상으로 경계해야
제 편에 속하는 특정 인물 내세워 치적 강조하며 찬양하다가
정작 역사에서 중시해야 할 시대 흐름 같은 것은 도외시해

우리는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의 영향으로 아직도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 역사를 좋게 보지 않는다. 조선 시대는 군주 독재의 시대라거나, 대한제국은 무능하여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역사라고 단칼에 날리는 폭언이 예사롭다. 이런 판국에 정조대왕 조명은 반갑기도 하지만 그 이후의 역사는 여전히 매도와 부정의 대상이다. 이런 역사 이해는 앞으로의 전진에 방해물이 되기 쉽다.
  
진실 전하는 자신감 담은 『실록』
 
조선 시대의 유교 왕정은 독재가 아니라 근·현대에 공화정이 우뚝 설 터전을 만들어 놓고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났다. 군주는 학문적으로 우수한 신하를 뽑아 경연(經筵) 자리에서 역사책이나 경전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의 정사를 토론하는 세미나 정치의 좌장이었다. 초야의 유생이라도 상소를 올리면 그것은 왕에게 전달되었다. 대신이 직무 중에 사고가 생기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두 번, 세 번 사직 상소를 올리는 것이 지금과 아주 달랐다. 잡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쓰는 부류가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비판받던 끝에 물러나는 것이 상례였다. 왕정을 통해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여 『실록』으로 정리하고, 산중 사고에 보관하여 진실을 후세에 전하는 자신감도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다.
 
수년 전 한 러시아 출신 미국 역사학 교수를 서울대 규장각 도서 서고로 안내한 적이 있다. 『실록』 보관 방에 도착하여 『승정원일기』앞에서 이것이 왕과 신하 간의 대화를 기록한 책이라고 소개하였더니 그는 뜻밖에도 놀란 표정으로 한국이 오늘날 급속한 발전을 하는 이유를 알겠다고 하였다. 그는 스탈린 시대 연구를 위해 소비에트 시대 크렘린 궁의 당서기 관계 기록을 조사하였더니 방문자 명단만 남아 있고 만나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전하는 기록은 하나도 없었다고 하였다. 독재와 소통의 정치 차이를 극명하게 지적한 논평 자리였다. 그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크렘린 궁 사용은 제정시대의 차르를 연상케 하니 집무 장소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발언하였다가 국외 추방을 당해 현재 미국에서 초빙교수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1930년대 ‘선원보’에 실린 정조 동판 흉상 어진. [중앙포토]

1930년대 ‘선원보’에 실린 정조 동판 흉상 어진. [중앙포토]

‘조선 후기의 세종대왕’이라고 할 정조대왕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넘어 소민(평민)과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역대 선왕의 왕릉을 하나씩 찾는 능행(陵行) 정치를 시작하였다. 출발 전에 어디서 행렬이 쉴 것이라고 일정을 미리 알렸다. 어가가 멈춰 쉬는 곳에서 평민의 민원 상소로써 상언(上言)을 접수하였다. 이에 관한 1400여 건의 직·간접 기록이 남아 있다. 귀경은 굳이 저녁 무렵 남대문을 통과하여 등불 행렬 속에 용안을 시민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관리들은 자신들의 입지 위축을 우려하여 능행을 반대하였으나 왕은 효도 행차라고 일축하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화성(수원) 묘소 능행 때는 연도의 ‘관광’ 인파가 10만을 헤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능행은 평민과 왕이 만나는 축제였다. 정조의 소민 보호 정치는 칭송할 것이 분명하지만, 최근 여권의 논평처럼 그의 정치 지향은 여기서 끝나버린 것이 아니었다.
 
정조대왕이 죽고 10여 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기득권 세력의 반동이 일어났고 이에 저항하는 민란의 시대가 펼쳐졌다. 이 시대를 연구하는 한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민란 중에도 억울한 사정을 관에 진정하는 소송이 끊이지 않은 것은 정부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버드대에서 한국 법제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존스 홉킨스대에서 가르치다가 40대에 작고한 윌리엄 쇼 교수는 조선왕조는 법치의 나라였기 때문에 500년 존속하였다는 고견을 남겼다. 조선왕조는 문약하여 혁명할 힘조차 없는 나라였다는 자학사관이 판칠 때였다.
  
고종, 백성에게 주권 이양 선언
 
절체절명의 시기 근대에 망국의 책임을 떠안은 고종황제의 진실은 무엇인가? 1893년 동학 농민군이 교조 신원 운동을 벌일 때 한 신하가 토벌을 건의하였다. 군주는 “동학교도도 내 백성인데 어찌 토벌한다는 말인가”하고 반문하였다. 그 신하가 물러서지 않자 고종은 “나는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고종은 나중에 부득이 초토사를 내려보내기는 하지만 왕은 언제나 화의를 바랐다.
 
고종은 정조대왕의 민국(民國) 정치 이념의 계승자였다. 능행 이벤트가 말하듯이 정조는 나라는 대민(大民), 곧 사대부 양반만의 것이 아니라 서민 대중의 것이란 뜻에서 민국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민국의 국(國)은 왕을 뜻하여 나라는 모든 민과 왕의 공유라는 정의였다. 이 용어는 고종 치세에 널리 사용되었다. 1895년 2월 청·일전쟁의 국난 속에 고종은 덕·체·지 삼양(三養)을 강령으로 하는 ‘교육 조서’를 반포하였다. 삼양 교육론은 존 로크의 교육 사상으로 18세기 이래 미국 중등교육의 근본이 되었다. 그것이 19세기 말 조선의 교육강령으로 채택된 것이다. 고종은 이 조서부터 서민 대중에게 내리는 글은 모두 국한문 혼용체로 쓰기로 하였다. 국가 중흥의 대본인 서민과의 소통 수단을 새롭게 한 것이다.
 
1907년 2월부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국민의 의무를 내세웠다. 일본의 강요로 나라가 억울하게 진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 취지를 밝혔다. 의무를 앞세운 국민 탄생의 역사, 세계사에서 예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고종의 신식 교육을 통한 국민 양성 정책이 이룬 큰 성과였다. 같은 해 6월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으로 강제로 태황제로 밀려난 고종은 1909년 3월 15일 대한(大韓)은 나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 만성(萬姓)의 것이라고 주권 이양을 선언하였다. 이후 내외의 항일 무장단체는 의병이 아니라 국군을 뜻하는 의군이라고 불렀다. 고종황제가 군자금을 보내 창설한 안중근 소속 부대 대한의군(大韓義軍)부터 그랬다. 러시아·미국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는 국민회라고 하였다. 나라 안팎에서 대소의 단체가 애국가를 만들어 부르면서 나라 찾기에 나섰다. 정조가 뿌린 씨가 큰 나무로 자랐다.
  
‘토착 왜구’ ‘죽창가’ 구호는 역사 남발
 
1919년 1월 고종황제 독살 소문이 퍼진 가운데 3월 1일 국장 예행연습을 기하여 독립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동학 연원의 천도교와 기독교가 함께 주동한 만세운동이었다. 동학은 그새 천주 모시기만 강조하던 것에서 벗어나 신도 개개인이 천주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체계로 바뀌었다. 신도의 자유와 자율을 강조한 천도교는 곧 동학의 완전한 근대화였다. 전 국민 만세운동의 힘으로 그해 4월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을 승계하는 민국이란 뜻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임시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 규정은 정조 이래 성장한 평민주의 지향 공화의식의 새로운 표현이었다.
 
3·1 독립 만세운동과 같은 해, 같은 달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이 발족하였다. 무장 투쟁을 포함한 모든 수단으로 전 세계 부르주아를 타도하여 세계 공산주의 공화국을 창립한다는 깃발을 내걸었다. 공산주의는 산업혁명의 음지에서 자란 메시아주의로, 그 계급투쟁론은 우리의 융합적 평등 지향 역사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우리 항일운동도 이로부터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어디까지나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이론으로 1980년대 후반 그 역사성이 소진하여 중심부가 붕괴하였다. 동학에 대한 반쪽 지식의 ‘토착 왜구’ ‘죽창가’ 구호, 역사성을 잃은 지 오랜 북조선 공산주의와의 조건 없는 공조 시도 어느 것이나 이성적이지 않다. 여기에 더한 정조에 대한 평가도 역사 남발의 느낌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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