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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항 권유 받은 장쭤린, 스스로 수갑·족쇄 차고 무릎 꿇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8〉

장쭤린은 1912년 3월부터 1928년 말까지 집권한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의 마지막 국가원수였다. 총통보다는 대원수 직함을 좋아했다. 1928년 1월 즈진청(紫禁城·자금성). [사진 김명호]

장쭤린은 1912년 3월부터 1928년 말까지 집권한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의 마지막 국가원수였다. 총통보다는 대원수 직함을 좋아했다. 1928년 1월 즈진청(紫禁城·자금성). [사진 김명호]

1626년, 후금(後金)의 칸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선양(瀋陽)에서 세상을 떠났다. 8년 후 아들 황타이지(皇太極·황태극)가 부족들을 평정했다. 선양을 셩징(盛京)이라 높여 부르고 천제(天祭)를 올렸다. 청 제국을 선포하고 여러 부족의 족칭(族稱)도 만주족으로 통일시켰다. 황타이지 사후 푸린(福臨·복림)이 황위를 이었다. 베이징으로 천도한 순치제 푸린은 셩징을 펑텐푸(奉天府)로 승격시켰다. 만주 전역(동3성)의 군·정을 총괄할 셩징장군을 파견했다.
 

장쭤린, 장인 돈으로 마적들 고용
7개 부락 묶어 무장조직 만들어
다른 지역 조직 습격해 세력 넓혀

체포하려다 마음 바꾼 자오얼쉰
17년 후의 국가원수 일으켜 세워

1907년 흠차대신을 총독으로 보내기 전까지 92명의 셩징장군이 만주에 군림했다. 자오얼쉰(趙爾巽·조이손)은 마지막 셩징장군이었다. 만주와의 인연은 셩징장군으로 끝나지 않았다. 최후의 동3성 총독 겸 흠차대신도 2년간 역임했다. 장쭤린(張作霖·장작림)과의 인연은 총독 시절부터 시작됐다.
  
청일전쟁 종군 뒤 세상 이치에 눈떠
 
장쭤린에게 혼쭐이 났던 주칭란(무릎에 중절모)은 중국 국가 의용군행진곡의 명명자였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 공으로 1968년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불교 문물 보호에도 힘썼다. 2019년 3월 29일 충칭에서 열린 광복군총사령부 복원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주칭란의 자녀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1937년 봄 화먼스(法門寺). [사진 김명호]

장쭤린에게 혼쭐이 났던 주칭란(무릎에 중절모)은 중국 국가 의용군행진곡의 명명자였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 공으로 1968년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불교 문물 보호에도 힘썼다. 2019년 3월 29일 충칭에서 열린 광복군총사령부 복원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주칭란의 자녀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1937년 봄 화먼스(法門寺). [사진 김명호]

장쭤린은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를 집적거리기 6개월 전인 1875년 3월 랴오닝(遼寧)성 하이청(海城)의 극빈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도박을 좋아했다. 놀음판 기웃거릴 때마다 아들을 데리고 갔다. “도박은 규정이 엄하다. 무슨 일을 하건 도박처럼 규정을 잘 지켜야 한다”며 어린 장쭤린을 교육시켰지만, 본인은 꼼수 부리다 맞아 죽었다. 모친은 수의사와 재혼했다. 도박꾼 아버지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았다. 장쭤린은 1년 남짓 다니던 사숙(私塾)과 발길을 끊었다. 그냥 다니라는 선생의 만류를 뒤로했다. 훗날 둥베이왕(東北王) 장쭤린은 사숙 선생 탕징쩐(湯景鎭·탕경진)에게 장남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유아교육을 맡겼다. 실력은 아무래도 좋았다. 한번 맺은 인연이 더 소중했다.
 
12세 소년 장쭤린은 찐빵 장수로 사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치안대원들이 오다가다 집어먹는 바람에 본전만 날려버렸다. 봇짐장수도 재미를 못 봤다. 남의 집에서 돼지 뒷바라지하며 밥을 먹었다. 장쭤린이 키운 돼지는 살찌는 속도가 느렸다. 늦게 죽이려고 약아빠지게 만들어 놨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쫓겨났다.
 
장쭤린은 갈 곳이 없었다. 3일간 모친이 사는 곳까지 걸어갔다. 모친의 새 남편은 말(馬) 치료가 전문이었다. 새로 맞이한 부인의 아들에게 치료법을 가르쳤다. 인근에 3대째 내려오는 녹림(綠林) 두목이 있었다. 녹림은 도적의 존칭이었다. 두목의 애마가 중병에 걸렸다. 장쭤린이 치료를 자청했다. 1주일 만에 완치시키자 녹림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마적(馬賊)과 토비(土匪)들이 다친 말 끌고 장쭤린의 진료실 앞에 줄을 섰다. 마적들은 사육과 기마술까지 뛰어난 젊은 수의사를 좋아했다. 왕래가 빈번했다.
 
자녀들과 함께한 장쭤린.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자녀들과 함께한 장쭤린.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쭤린은 종군했다. 패잔병으로 돌아왔지만 세상 이치에는 눈을 떴다. 도박장과 유흥업소 전전하며 자신의 전공(戰功)을 늘어놨다. 과장술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지주 자오디엔위안(趙占元·조점원)이 사위로 삼겠다고 나섰다. 전쟁에 승리한 일본군의 행패가 도를 넘었다. 주민들은 “러시아 곰들이 떠난 자리에 일본 원숭이들이 몰려들었다”며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공권력이 느슨해지자 토비나 마적들의 극성도 더 심해졌다. 주민들은 보호책을 강구했다. 무기를 구입하고 마적들을 고용했다. 명칭은 보험대(保險隊)였다. 자오디엔위안은 사위 장쭤린에게 보험대를 조직해 보라고 권유했다. 장쭤린은 장인이 출자한 돈으로 20여 명을 무장시켰다. 이웃 마을의 유력인사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다들 장쭤린의 화려한 언사에 귀가 솔깃했다. 장쭤린은 순식간에 7개 촌락을 하나로 묶은 보험구를 출범시켰다. 마적 입문이나 다름없었다.
 
장쭤린의 보험대는 보험구 안전에 안주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다른 보험구를 습격해 세력을 넓혔다. 만주국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징후이(張景惠·장경혜)는 원래 두부장수였다. 회고를 소개한다. “토비나 녹림은 제법 규모가 있는 도적집단이었다. 일본인들은 보험대와 토비를 혼동했다. 녹림까지 통털어 마적이라고 불렀다. 내가 이끌던 보험대는 100여  명 가량이었다. 하루는 장쭤린이 우리 구역을 방문했다. 준수한 용모에 해학이 넘쳤다.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두목 자리를 내주고 부두목으로 내려앉았다. 장쭤린은 화나면 국물도 없었다. 투항하러 온 두리싼(杜立三·두립삼)과 부하들을 몰살했다.”
  
만주총독 측근의 관모 장식 한 방에 날려
 
1911년 6월 동3성 총독으로 부임한 흠차대신 자오얼쉰은 장쭤린 제거를 결심했다. 군량미 탈취와 관병 살상이 이유였다. 측근 주칭란(朱慶瀾·주경란)에게 지시했다. “직접 가서 체포해라.” 장쭤린은 명사수였다. 관복입고 나타난 주칭란의 관모에 달린 수술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자오얼쉰은 장쭤린의 대담한 반응에 혀를 내둘렀다. 생각을 바꿨다. 특사 편에 투항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냈다. “혜이산(黑山)에서 만나 방법을 논의하자.” 장쭤린은 유인이라고 의심했다. 특사에게 엉뚱한 조건을 제시했다. “복통으로 귀순하러 갈 수가 없다. 방법이 있다. 내일 새벽에 닭 혀로 속을 채운 만두 50개 먹으면 통증이 완화된다.” 자오얼쉰은 장쭤린을 살리기로 작정했다. 당장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새벽, 닭 혓바닥 만두 50개를 받은 장쭤린은 감동했다.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자오얼쉰 앞에 나타나 벌을 청하며 무릎을 꿇었다. 자오얼쉰은 계단을 내려가 17년 후의 국가원수를 일으켜 세웠다. 몇 개월 후 벌어질 엄청난 사건을 예고하는 만화 같은 장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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