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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택배업계…권한도 규정도 없는 무법지대 터졌다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에서 택배노동자 사망 사건과 관련해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다. 뉴스1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에서 택배노동자 사망 사건과 관련해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다. 뉴스1

 “모든 분께 사과드립니다.”
CJ대한통운 박근희 대표이사(부회장)는 택배기사 사망 사건과 관련해 두 번 고개를 숙였다. 박 부회장은 22일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문을 발표했다. 올해 택배기사들이 잇따라 숨진 사건과 관련해 ㈜한진이 사과문을 발표한 데 이어 업계에서 48%의 시장 점유율로 1위 업체의 대표이사가 직접 나선 것이다. 이날 확인된 사건을 포함해 올해 과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택배기사 13명 중 6명이 CJ대한통운 소속이다.  
 
CJ대한통운은 택배기사 등 택배 종사자 보호 종합 대책도 발표했다. 다음 달부터 분류지원인력 3000명(현재 1000명)을 추가로 투입하고, 내년 상반기 중으로 모든 택배기사가 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권고하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매년 500억원이 추가로 들 것으로 CJ대한통운은 예상했다. 올 상반기 이 회사의 택배 부문 영업이익은 830억원이었다. 이렇게 되면 택배 기사들은 오전 중 업무개시 시간을 조정하는 ‘시간 선택 근무제도’를 활용해 전체 근무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초과 물량이 나올 경우 택배기사 3~4명이 팀을 이뤄 물량을 분담하는 ‘초과물량 공유제’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택배 물량·시장규모 급증했지만 평균단가는 줄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택배 물량·시장규모 급증했지만 평균단가는 줄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자동화 수준도 높이기로 했다. 자동분류장치(휠소터)에 이어 2022년까지 소형상품 전용분류장비(MP)를 추가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CJ대한통운은 서브 터미널 191곳에 휠소터를 구축해 전체 물량의 95%를 자동 분류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MP 구축을 시작해 현재 35곳에 구축돼있지만 2022년 말까지 100곳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CJ대한통운의 전체 물량 중 소형택배 화물 비율은 90%에 이르는 만큼 MP 구축을 통한 작업시간 감소 효과는 클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개인사업자 간의 문제”…‘대리점 체제’가 문제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강남2지사 터미널 택배분류 작업장에서 택배기사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강남2지사 터미널 택배분류 작업장에서 택배기사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CJ대한통운이 악화하는 여론에 밀려 이 같은 지원책을 급히 내놨지만,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택배 사업 구조상 택배 종사자 문제에 본사가 직접 관여할 의무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국내 주요 택배사는 허브 터미널과 지역별 서브 터미널을 가동하고, 대리점은 택배기사를 고용해 서브 터미널에서 물건을 받아 배송한다. 직영을 기반으로 하는 대리점 협력 체제다. 영세한 업체들은 터미널까지도 위탁 운영한다.  
 
택배기사는 개인 사업자가 운영하는 대리점과 계약을 맺는다. 개인 사업자(대리점)가 개인 사업자(택배기사)와 계약을 맺고 고용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대리점마다 수수료율이 다르거나 대리점주와의 친분에 따라 손쉬운 배송구역을 배정받기도 한다. 본사가 이런 문제를 관리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택배기사 과로사나 갑질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본사가 침묵을 지켜왔던 이유다.
 

CJ대한통운 정태영 택배 부문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택배기사를 직접 고용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답변을 유보하겠다”고 답했다. 3000명을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밝힌 분류지원 인력 역시 현행과 같은 조업사 지원(일용직) 형태다. 대책에 포함한 택배기사 산재보험 가입 문제도 ‘권고’ 수준이어서 강제력은 없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택배기사는 “분류지원 인력을 추가 투입한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CJ대한통운은 업계에서도 근무환경이 좋은 편이어서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가는 상황이라 다른 업체 택배기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고 말했다. 이어 “산재보험 가입도 택배 기사들이 비용을 부담해야 하므로 무조건 들라고 하는 것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비용 때문에…“직영으로 운용하긴 어려워”

택배 업무 과정.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택배 업무 과정.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런 구조는 비용 문제와 직결된다. 택배 사업은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직영 체제로 운영됐지만 2000년대 들어 대리점 체제로 자리 잡았다. 홈쇼핑과 인터넷 거래가 늘면서 처리 물량이 갑자기 크게 늘어서다. 택배 물량은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매년 약 10%씩 늘었다. 여기에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올해 상반기에만 택배 물량이 30% 폭증했다.
 
한 택배회사 관계자는 “급증하는 물량을 소화하려면 허브 터미널 확대나 자동화 장비 도입 등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하다”며 “모든 걸 직영으로 운영할 경우 고정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사업을 운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본사와 대리점, 지역 등에 따라 택배 업무 환경도 크게 달라진다. 이 관계자는 “최근 택배 기사를 집중적으로 추가 모집하고 있지만, 지방의 경우 물량 증가에 비해 인력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곳도 있다”고 말했다.  
 

“법이 없어서”…무법지대에 방치된 택배기사들  

국정감사 10일차인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택배물류현장에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들이 최근 택배노동자가 숨진 것 등과 관련해 현장 시찰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국정감사 10일차인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택배물류현장에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들이 최근 택배노동자가 숨진 것 등과 관련해 현장 시찰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정부도 이 문제에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 택배 종사자들을 보호할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장인 박홍근 의원은 최근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이하 생물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택배 종사자에게 사업자와의 운송 위탁계약 갱신 청구권을 6년간 보장하고, 사업자가 계약을 해지할 경우 2회 이상 계약 위반 시정 요구를 하도록 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택배 산업을 지원하고 표준화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논란이 됐던 ‘분류’ 작업에 대해선 업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생활물류’ 정의에서 제외하고 책임 소재를 법안에 명시하지 않았다. 업체 간 편차가 워낙 커서 일괄적으로 책임 소재를 가리기가 어려워서다. 대신 사업자와 종사자가 별도로 맺는 표준 계약서에 분류 업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담도록 했다. 박홍근 의원실 관계자는 “택배 종사자들을 둘러싸고 문제가 끊이지 않는 건 법이 없어서 생긴 일”이라며 “추후 보완하더라도 관련 법을 우선 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다만 업계에선 “운송계약을 6년간 보장하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 법안”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택배사 관계자는 “대다수 택배 기사는 열심히 하지만, 근태가 불량하거나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누가 처리하겠나. 대리점이 오죽하면 택배기사를 자르겠냐”라고 지적했다.
 

물동량 40배 됐는데 단가는 41%↓…저단가 고착화

택배비 구성.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택배비 구성.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업계는 “단가 현실화가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택배업계는 단가 인상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홈쇼핑이나 인터넷 쇼핑몰 등 거래처들이 재계약 시점에 저단가를 제시하는 택배기사나 업체로 ‘갈아타기’를 하기 때문에 택배기사들은 저단가 출혈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CJ대한통운도 올 초 화주와 단가 인상 협의에 나섰다가 이 같은 이유로 흐지부지됐다. 
 
단가는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따르면 택배 물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도 택배 평균 단가는 1998년 3789원에서 2018년 2229원으로 20년 새 약 41% 낮아졌다. 그 기간 물동량은 5795만개에서 25억4300만개로 증가율만 4288%가 넘는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택배 노동자의 근로 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는 데 드는 비용은 결국 사용자와 소비자가 분담해야 한다”며 “택배비를 올리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지역별, 무게별로 택배 단가를 차등화해야 한다는 방안이 일부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힘을 얻고 있다. 쌀이나 생수 등 무거운 물건에 대해 무게별로 추가 수수료를 부과하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올라야 하는 주택에 대해선 택배 기사들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주택에선 무거운 물건의 배송을 자제하고 당일배송이나 새벽배송도 꼭 필요할 때만 하는 등 소비자들도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리점의 불공정 계약을 막고 최소한의 휴식을 보장하는 표준 계약서를 작성하고, 자영업자이면서 노동자이기도 한 택배 기사의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상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택배 기사는 개인 사업자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며 “특히 표준 계약서에 택배 기사의 업무 범위나 노동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추인영ㆍ배정원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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