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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문제라도 만들어야" 무더기 자료요청에 멍드는 국감

#1. 에너지 공기업 직원 A씨는 지난 14일 오후 11시쯤 직장 상사로부터 다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한 보좌진이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제출해달라고 요구한 자료 때문이었다. A씨는 결국 한밤중에 다시 출근해 새벽 4시까지 일했다. A씨는 “기껏 밤새 자료를 만들어 보냈더니 정작 국정감사에선 아무런 언급이 없더라. 한 달간 만든 국감 자료가 100건이 넘는데 제대로 읽어보긴 한 건지 모르겠다”며 울분을 토했다.

 
#2. 한 금융 공공기관은 이번 국정감사 기간에만 7000여건의 자료 제출을 요청받았다. 절반 이상은 동일한 통계를 서로 다른 의원실에서 요청한 자료였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화제가 됐던 내용을 그대로 베껴 경쟁적으로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 해당 기관 관계자 B씨는 “각 의원실 요청 자료가 비슷하다 보니 누가 먼저 보도자료를 만들었는지를 놓고 서로 다투기도 한다”고 말했다.

 
#3. C비서관은 지난 18일 주말에도 국회에 나왔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의 생일이었지만, 다음날까지 보도자료를 완성하라는 의원 지시에 맞추기 위해 출근을 자청했다. 사흘 전 자료를 요청한 피감기관에선 “주말이라 자료 제출이 어렵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C비서관은 해당 기관의 간부에게 연락해 담당 직원을 출근시켰다. C비서관은 “실적주의에 매몰된 의원들 욕심에 보좌진도, 피감기관도 의미 없는 자료요청과 회신에 찌들어 있다”고 했다.

 

‘실적주의’ 늪에 빠진 국정감사 

국회 보좌진에게 국정감사는 ‘밤샘 시즌’으로 불린다. 국감이 진행되는 20일간 새벽 퇴근은 물론, 휴일에도 출근해 자료를 만든다. 보도자료 건수를 기준으로 의원 실적을 평가하는 민주당에선 보좌진마다 개인별 할당량을 요구받기도 한다. 피감기관에 수천건의 통계 자료를 무더기로 요청한 뒤, 개별 자료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 보도자료를 내는 일이 반복되는 이유다. 
 
이재명 지사는 지난 18일 페이스북을 통해 국감 요청 자료로 몸살을 앓는 공무원들의 고충을 호소하며 "내년부터는 국정감사 사양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다"고 했다. [뉴스1]

이재명 지사는 지난 18일 페이스북을 통해 국감 요청 자료로 몸살을 앓는 공무원들의 고충을 호소하며 "내년부터는 국정감사 사양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다"고 했다. [뉴스1]

이와 관련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난 18일 페이스북을 통해 “며칠째 경기도 공무원들은 물론 시군 공무원들까지 (국감) 요구자료 수천건을 준비하느라 잠도 못 자고 있다”며 “질의사항도 일찍 주는 경우가 거의 없고 전날 밤에야 주거나 심지어 안 주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소속의 한 보좌관은 “국감 시즌이면 의원실마다 적게는 400~500건, 많을 경우 1000건 이상의 자료를 피감기관에 요청한다”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만한 내용이 아닌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자료를 만들지 않으면 의원으로부터 ‘국감 준비 제대로 안 했냐’는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민주당 보좌관은 “국정감사가 언젠가부터 없는 문제도 어떻게든 발굴해 무조건 비판을 해야 하는 제도가 됐다”며 “매년 똑같은 문제가 지적돼도 피감기관 입장에선 ‘국감 시기만 잘 넘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티니 국정감사의 의미 자체가 많이 퇴색됐다”고 지적했다.  
 

'무더기 요청' 후 폐기되는 국감 자료 

지난 19일 각 의원실에서 출입 기자에게 전송한 보도자료. 이날 하루에만 240여개의 국정감사 보도자료가 쏟아졌다. [정진우 기자]

지난 19일 각 의원실에서 출입 기자에게 전송한 보도자료. 이날 하루에만 240여개의 국정감사 보도자료가 쏟아졌다. [정진우 기자]

무더기로 요청한 자료가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보좌진들이 제대로 검토도 못한 채 자료를 내다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국민의힘 소속 한 비서관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피감기관 업무는 전문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자료를 받고도 이해하기 힘들다”며 “이른바 ‘쌍끌이’로 수백건을 요청한 자료가 한꺼번에 오면, 주요 기관을 제외한 나머지 기관의 자료는 뒷전으로 밀리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보좌진과 무더기 자료 요청에 지친 피감기관이 말다툼을 벌일 때도 있다. 대개 자료 회신이 늦거나, 대외비 자료라 외부에 보낼 수 없을 때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고 한다. 국회를 담당하는 한 정부 부처 공무원은 “어느 날 보좌관에게 ‘이렇게 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았다”며 “최근 3년치 부서별 출장 현황자료 전체를 요청해 취합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무작정 자료를 빨리 달라고 생떼를 쓰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상시 국감 전환" 주장도 

민주당 내 일각에선 '일하는 국회법'의 취지에 맞춰 국감 역시 상시 국감으로 전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사진은 지난 20일 윤호중 법사위원장 주재로 진행된 서울고법·수원고법과 산하 법원들에 대한 국정감사 현장. [연합뉴스]

민주당 내 일각에선 '일하는 국회법'의 취지에 맞춰 국감 역시 상시 국감으로 전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사진은 지난 20일 윤호중 법사위원장 주재로 진행된 서울고법·수원고법과 산하 법원들에 대한 국정감사 현장. [연합뉴스]

매년 반복되는 국감의 고질적 문제에 정치권에선 주기적으로 ‘국감 폐지’가 논의되곤 했다. 2017년 추미애 당 대표 시절 민주당이 국정감사를 폐지키로 의견을 모은 게 대표적이다. 당시 민주당은 2018년 6월 헌법 개정을 추진키로 하면서 그 세부 내용으로 상시 국회 도입과 국감 폐지에 합의했다. 하지만 개헌 논의가 소멸되면서 국감 시스템 개편 주장도 이어지지  못했다.
 
최근 정치권 일각에선 국정감사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정기국회 때 국회 본연의 업무인 입법과 예산 대신, 국정감사에 과도한 에너지를 쏟는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다. 앞서 민주당 주도로 지난 7월 발의된 국회법 개정안엔 9월 정기국회 이전에 국정감사를 완료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경우 상임위별로 피감기관 감사 계획을 1년 단위로 설정하고, 매월 전체회의에서 감사를 진행하는 ‘상시 국감’도 가능해진다.  
 
민주당의 한 보좌관은 “1년 365일 국정감사를 진행하게 되면 그만큼 업무 부담이 늘어나겠지만, 현재 3주짜리 ‘이벤트 국감’보단 내실 있는 감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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