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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빗장 확 풀린 '미국식 소송'···주가 악재, 애꿎은 개미 잡는다

코스피·코스닥 지수가 3% 넘게 급락한 지난 8월20일 서울 중구 명동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 모습. 뉴스1

코스피·코스닥 지수가 3% 넘게 급락한 지난 8월20일 서울 중구 명동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 모습. 뉴스1

기업들이 ‘소송 증가’라는 큰 변수를 맞게 됐다. 최근 법무부가 모든 업종의 기업과 영리활동에 적용 가능한 집단소송제, 그리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입법예고하고, 연내 국회 통과를 추진하면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주식에 투자한 개인 투자자들이 부당한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속터지는 기업 규제 ①]

조사 결과, 상위 20개사 소송액 10조 육박  

이미 국내 상장사들은 다수의 소송에 걸려있다. 20일 중앙일보가 지난해 말 기준 상장 대기업들의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소송 금액 상위 20개사의 총 피소 소송가액은 9조1905억원, 소송건수는 3967건에 달했다. 각 기업의 소송가액은 평균 4595억원으로 삼성물산과 GS건설 등은 무려 1조원이 넘었다. 소송이 공시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소송 금액은 훨씬 클 것으로 예상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입법예고안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30대 그룹을 기준으로 소송 비용이 10조원까지 더 추가될 수 있다고 추정했다.
2019년 상장 대기업 소송공시 현황.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2019년 상장 대기업 소송공시 현황.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정부 입법예고안은 ‘쉬운 소송’을 현실화했다. 집단소송제의 핵심은 ‘분야(업종) 제한 없이 피해자가 50인 이상이면’ 누구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재는 주가조작·허위공시 등 증권 분야에만 한정돼 있다.
 
각 개별법 형태로 존재하던 징벌적 손해배상제 역시 이번에 상법으로 편입되면서 소송 대상이 자영업자와 기업 등 영업행위를 하는 거의 모든 주체로 넓어졌다. 배상액 한도는 ‘실제 손해액의 3배’에서 5배까지로 늘어났다.  
 

소송 소식만으로 떨어지는 주가 

법무부는 ‘책임 있는 기업활동을 유도하기 위한 법’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산업계와 법조계 등에서는 기업 이미지와 주가는 소송 제기 사실만으로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글로벌 경제컨설팅사 피데레스(Fidres)가 1640건의 증권 집단소송을 표본으로 분석한 결과 소송이 제기된 날 주가는 소송 제기 30일 전보다 평균 13% 하락했다. 
 
실제로 침구류 등을 만드는 국내 코스피 상장기업 지누스는 지난 3월 미국에서 집단소송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주가가 4 거래일 동안 40% 넘게 폭락했다. 회사 측은 부랴부랴 “미국의 다른 주에서 발생한 유사한 소송에서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는 해명 공시를 올렸지만, 주가는 한동안 떨어진 뒤에야 회복됐다.
 
미국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는 지난 2006년 9월 연방법원이 흡연자들에게 최대 2000억 달러(약 230조원)의 집단소송 권리가 있다고 판결하면서 주가가 하루 만에 6.4% 하락했다. 결국 필립모리스는 지난한 소송 끝에 2016년 승소했다.  
 

“부작용까지 미국 따라가나” 

집단소송제 전문가인 한석훈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집단소송은 미국이 실행해 본 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사람을 모아서 하는 기획 소송 등 남용 여지가 너무 커 미국 내에서도 ‘소송 망국론’이 나오고 남소방지 입법을 강화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는 “대표 당사자가 모든 피해를 한꺼번에 청구하는 것이라 청구액수 자체가 어마어마해 소송 제기 자체가 기업을 크게 흔들고 주가를 폭락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작용 때문에 영국·일본·독일·프랑스 등도 극히 제한적으로 시행하고 있는데, 왜 구태여 부작용까지 미국을 따라가려 하나”라고 비판했다.  
G5 국가 집단소송·징벌적손배 도입 현황.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G5 국가 집단소송·징벌적손배 도입 현황.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실제 손해액보다 최대 5배에 달하는 배상액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소송을 부추길 수 있다”며 “한국은 과징금·과태료 같은 행정처벌과 형사처벌 중심의 대륙법 체제인데, 천문학적 규모의 민사적 손해배상 가능성까지 더해지면 세계 최고의 기업 과잉처벌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업보다 법무팀…‘주객전도’ 우려 

더 큰 문제는 기업이 소송 가능성으로 인해 채용과 사업 투자에 몸을 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미국의 제조업이 몰락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집단소송제였다”며 “신제품이 나오든 신기술을 적용하든 ‘부작용이 있는 거 같다’라고만 하면 집단소송이 걸리는데 누가 투자를 하겠나. 이렇게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면 주가엔 더욱 장기적인 악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10대 그룹에 속하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은 기술 개발하고 돈을 버는 부서가 중요한데, 저런 대규모 소송들이 쉽게 터지게 되면 법무팀이나 제도분석팀, 리스크관리팀 등 지원 부서에 자원을 더 들이는 주객전도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전 교수는 “소송 비용, 화해 비용, 손해 배상금 등을 다 더하면 대기업들은 버틸지 모르지만, 중소·중견기업이나 코스닥 종목들은 소송에 걸리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벤처기업협회는 지난 13일 입장문을 내고 “블랙 컨슈머와 법률 브로커가 판치게 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소송대응 능력이 없는 중소·벤처기업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생존의 위협까지 받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전 교수는 “법은 좌우와 앞뒤를 따져서 매우 신중하게 입법해야 한다”며 “부작용과 파급력에 대한 우려를 듣지 않고 밀어붙이면 영업·창업·투자가 다 어려워져 장기적으론 결국 기업들이 한국에 거점을 두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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