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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조광조의 좌절에서 배우는 급진 개혁의 종말

기자
송의호 사진 송의호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84) 

경기도 용인 심곡서원 사우(祠宇, 사당)에 모셔진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위패와 초상화. [사진 송의호]

경기도 용인 심곡서원 사우(祠宇, 사당)에 모셔진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위패와 초상화. [사진 송의호]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 선생. 그의 이름 앞에는 ‘시대를 앞선 개혁가’란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개혁이 화두가 될 때면 거론되는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생은 33세인 1515년(중종 10) 관직에 첫발을 내디딘다. 효성과 청렴으로 추천을 받아 종6품 조지서사지(造紙暑司紙)에 임명된다. 5년이 전부였던 관료 생활의 출발이다. 그해 정암은 알성시 을과로 급제한다. 이후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등 주로 언관직을 수행한다.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다. 그는 조정이 왕후 문제로 의견이 갈리자 “언로(言路)가 통하면 다스려지고 막히면 어지러워지며 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종은 이후 조광조만 남기고 사헌부와 사간원을 모두 갈아치운다. 그의 말과 글은 개혁이라는 시대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다. 임금은 신임했고, 정암은 제도를 하나씩 개혁한다. 그는 사회 모순이 사장(詞章, 시가와 문장)을 중시하고 도학(道學, 사람의 도리)을 경시하는 학문 풍토에 기인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분위기를 혁신하기 위해 도학을 높이고 왕도정치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심곡서원의 중심 건물인 강당의 모습. [사진 송의호]

심곡서원의 중심 건물인 강당의 모습. [사진 송의호]

 
개혁은 거침이 없었다. 전국에 여씨향약을 실시하고 미신이나 다름없는 도교 관청 소격서를 혁파했다. 일 처리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퇴계가 쓴 정암의 행장에 일화가 나온다.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와 옥당(홍문관)이 소격서 파하기를 청하여도 여러 달 동안 윤허가 없었다. 선생이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윤허를 받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다’ 하고 저녁에 대간들이 모두 물러갔는데도 옥당에 머물며 계(啓)를 논해 마침내 윤허를 받고 나오셨다.”
 
1519년 정암은 대사헌으로 승진한 뒤 과거제의 폐단을 보완하는 현량과(賢良科)를 도입한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대책(對策)만 시험 보고 채용하는 제도이다. 명분은 이랬다. “나라가 선비를 뽑는데 오로지 과거에만 의지한다. 세도는 점점 멀어지고 과거 공부를 하는 자는 글이나 외는 데 힘쓰고 의리를 알지 못한다. 치도(治道)가 날로 떨어지는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그 결과 개혁 성향의 젊은 선비가 많이 등용돼 조광조를 지지하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신진사류 김식‧김정‧박상‧김구‧기준 등이다.
 
정암은 개혁이 점차 뿌리를 내리자 현량과 출신 신진사류들과 함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추진한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 당시 책봉된 100명이 넘는 공신 중 하자가 있는 76명을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훈구 세력의 집권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었다. 
 
심곡서원 건너편 언덕에 마련된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소. 비석 하나에 문인석만 있다. [사진 송의호]

심곡서원 건너편 언덕에 마련된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소. 비석 하나에 문인석만 있다. [사진 송의호]

 
훈구 세력은 강하게 반발한다. 홍경주‧남곤‧심정 등 훈구파는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움직여 임금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한다. 한편으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해 의심을 조장시킨다. 중종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의 개혁을 기본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방법이 과격하고 미숙해 염증을 내고 있었다. 거기다 위훈삭제 조치가 반정을 반역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중종은 마침내 훈구 대신의 탄핵을 받아들인다. 조광조 일파에 처벌이 내려진다. 위훈 삭탈 4일 만에 일어난 기묘사화다. 선비 70여 명이 화를 입었다. 사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림이 성장해 개혁을 눈앞에 두고 물거품이 되었다는 좌절감과 함께 희생자가 가장 많은 사화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곱씹을 대목이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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