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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 숨어 소주 마신 죄, 연병장서 몽둥이에 맞아죽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저 두 놈은 너희 동기가 될 자격이 없다. 몽둥이로 때려죽여라.”

 
1968년 7월 11일 한낮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실미도 부대 연병장. 단상에 꼿꼿이 선 이모 소대장이 공작원들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밧줄로 꽁꽁 묶여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이OO·신OO 공작원을 죽이라는 지시였다. 천막봉을 손에 들고 멈칫대는 공작원들 등에 기간병들의 몽둥이가 내리꽂혔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⑧]첫 탈영

 

실미도는 점점 죽음의 땅으로 

눈을 질끈 감은 공작원들은 천막봉을 휘둘렀다. 그렇게 공작원 두 명은 숨졌고, 시신은 사격장을 파고 묻었다. 이날 밤 교육대장은 공작원들에게 와룡 소주(인천의 3대 소주)를 나눠줬다. 소주를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상에 누운 공작원들의 눈에는 연병장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았고, 언젠가 그 피를 내가 흘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연병장에서 살해된 두 명의 공작원은 하루 전 실미도 인근 무의도에서 2인 1조로 야간 독도법(지도 보는 법)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오전 4시쯤까지 무의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민가 부엌에 숨어들어 소주를 마셨다.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기간병들에게 잡혔고, 훈련을 중단한 채 부대로 끌려왔다. 실미도 부대 교육대장은 이 소대장에게 “처형”을 지시했고, 이 소대장은 공작원들의 손으로 동료를 처단하라고 했던 것이다. “군기를 와해시키고 동료를 배신한 놈은 처형해야 한다”는 게 소대장과 교육대장의 결정이었다.
 
8월 25일 인천 용유초등학교 무의분교(옛 무의초)의 운동장. 우상조 기자

8월 25일 인천 용유초등학교 무의분교(옛 무의초)의 운동장. 우상조 기자

 

감금·가혹행위 길어지자 인내심 바닥나 

실미도 공작원들의 탈영은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 훈련 강도가 가혹 행위 수준을 넘어섰다. 공작원들의 달리기 속력을 높이겠다며 뒤에서 위협 사격을 하다 옆구리를 관통시키기도 했다. 안전 장비 없이 외줄 타기 훈련을 하다 추락해 머리와 다리를 다치기도 했다. 하지만 공작원들은 휴가는커녕 외출조차 금지됐고, 서신 왕래도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훈련을 받은 것이다. 거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먹거리조차 돼지 먹이 수준으로 열악해지면서 청년들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북파공작을 위해 백령도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후부터 공작원들은 기간병들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북파 공작 후 보상을 받아 새 삶을 살겠다는 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기간병들은 기간병들대로 공작원들의 저항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1970년 8월에는 윤OO 공작원이 박모 기간병을 폭행했고, 기간병들은 공작원들에게 윤 공작원을 몽둥이로 집단 린치를 가해 살해하도록 했다.
 

공작원 저항에 임의 처형으로 대응  

실미도 부대 내에서 군기 사고가 나면 임의 처형이 일상화돼갔다. 실미도 공작원들의 집단 저항이 거세질수록 기간병과 지휘관들은 더 극악한 처벌로 진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법 절차를 무시한 임의 처형은 사실상 살인 범죄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근본적으로 군이 공작원들에게 탈영이나 하극상 죄를 덮어씌운 것도 부당하다는 게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지적이다. 실미도 부대가 만들어질 당시 공작원들의 신분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채용됐기 때문이다.
 
8월 25일 실미도 해변가. 폐선이 눈에 띈다. 우상조 기자

8월 25일 실미도 해변가. 폐선이 눈에 띈다. 우상조 기자

 

“수영 훈련하다 익사, 유기치사 여지” 

실미도 부대 내에서 억울한 죽음은 또 있다. 1969년 8월 22일 조OO 공작원이 중무장한 채로 바다에서 수영 훈련을 하던 도중 익사했는데, 기간병의 보호 조치 불이행에 따른 유기치사로 볼 여지가 있다고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기록했다.
 

“조OO가 힘에 겨워 물속에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데 김모 소대장이 ‘몽둥이로 때려죽이겠다’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다 물속에서 꼴깍꼴깍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김창구 공작원·1971년 재판 기록)

 
김 소대장은 이에 대해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와 면담에서 상반된 진술을 했다. “조OO가 20m쯤 떨어진 곳에서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여 ‘괜찮냐’ 하고 물었더니 ‘괜찮습니다’라고 하여 그런 줄 알고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대장님’ 소리가 들렸고, 조OO 쪽을 봤더니 물속으로 가라앉아 구조하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조 공작원의 시신은 화장되지 않고 실미도 남단 야산에 묻혔다. 현재 조 공작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남아 있다. 김 소대장은 “조총을 쏘며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고 주장했다.
8월 25일 실미도 내 조 공작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우상조 기자

8월 25일 실미도 내 조 공작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우상조 기자

 
백령도 회군 후 실미도 부대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면서 사건·사고가 잇따르고 공작원이 죽어 나갔다. 실미도가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실미도를 넘어 무의도 주민들이 피해를 보는 강력 사건이 발생한다. 다음 회에서 계속.
 
※본 기사는 국방부의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2006년)와 실미도 부대원의 재판 기록, 실미도 부대 관련 정부 자료, 유가족·부대 관련자의 새로운 증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심석용·김민중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지난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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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issue/1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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