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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때려죽인뒤 불태웠다"···실미도 훈련병의 처참한 죽음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동료를 때려죽이고, 그 시신을 기름으로 태워 바다에 띄우도록 했다.”

 
북한 침투 작전이 취소돼 백령도에서 돌아온 실미도 부대는 기간병과 공작원간 극심한 갈등에 휩싸인다. 실미도 공작원의 군기를 유지하려는 기간병과 사기가 땅에 떨어진 공작원들은 사사건건 부딪혔다. 1970년 8월 어느날 실미도에서는 처참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⑦]첫 하극상

 
실미도 부대 연병장. 누렇게 색이 바랜 흙투성이 군복 차림의 윤태산 공작원이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끌려 나왔다. 땡볕의 연병장에 무릎이 꿇린 그의 군복은 땀으로 얼룩졌고 이미 퉁퉁 부어 피범벅인 얼굴은 분간조차 어려웠다. 연병장에 3열 종대로 늘어선 20여명의 공작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는 윤 공작원을 애써 외면했다. 그 순간 장 모 공작원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몽둥이로 20대씩 때려야 한다”고 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낮게 떨리고 있었다. 기간병들은 직전 “윤태산은 북한 적지에서 임무 수행은커녕 나라를 팔아먹을 놈이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공작원에게 몽둥이 찜질로 동료 살해시켜  

발을 땅속에 파묻은 듯 공작원들은 버텼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등이 떠밀린 순서대로 나아가 몽둥이를 들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공작원 뒤에는 실탄을 장전한 기간병들의 눈빛이 서슬 퍼렜다. 대낮의 몽둥이질에 비명을 내지르던 윤 공작원은 이내 피를 토한 채 그렇게 숨이 멎었다. 윤 공작원의 사망을 확인한 파견 대장은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공작원들은 윤 공작원의 시신을 불에 태운 뒤 바다에 띄웠다. 그날 밤 공작원들에게는 와룡 소주(1970년대 인천의 3대 소주로 알려짐)가 공급됐다.
 

“하찮은 일로 정든 동료를 때려죽이게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시체를 디젤 기름에 튀겨 바다에 띄우도록 만든, 잔악한 비인간성에 몸서리쳤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비참한 말로를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임성빈 공작원·재판 기록)

임성빈 공작원 재판기록. 중앙포토

임성빈 공작원 재판기록. 중앙포토

 
북한 침투를 위해 출동했다가 백령도에서 회군한 실미도 부대의 기간병과 공작원은 목표를 잃고 방치됐다. 북파 작전은 기약 없이 미뤄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존재 자체도 잊혔다. 부대 안에서 기간병의 가혹 행위는 일상이 됐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분노한 공작원의 하극상이 빈번했다. 윤태산 공작원의 어이없는 죽음은 훈련용 평행봉을 만들러 무의도에서 나무를 베던 중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됐다.
 

"술 사달라" 주먹다툼이 화근  

윤 공작원은 박모 기간병과 단둘이 떨어져 나무를 베다 “술 한 잔 사달라”고 윽박질렀고, “안 된다”는 박 기간병과 싸움을 벌였다. 한참 주먹다짐을 한 두 사람은 “부대로 복귀하면 남들한텐 없던 일로 하자”고 약속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박 기간병을 본 동료 기간병에게 하극상 사실이 드러났다. 거듭된 추궁에 박 기간병은 “윤태산한테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김 중사가 실미도 밖의 상급 부대에 가 있던 파견 대장에게 무전을 해 ‘운동선수 규칙 위반했으니 귀대 바람’이라는 암호로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파견 대장은 그날 오후 4시쯤 부대로 돌아온 뒤 사무실에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김 중사와 이야기했습니다. ‘그놈 주먹이 세니까 꽁꽁 묶어서 천장에 매달아 놓을까 아니면 그대로 둘까 어떻게 할까’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한모 기간병·재판기록)

8월 25일 무의도에서 바라본 실미도. 썰물 때 두 섬 사이에 육지길이 만들어져 도보로 오갈 수 있다. 우상조 기자

8월 25일 무의도에서 바라본 실미도. 썰물 때 두 섬 사이에 육지길이 만들어져 도보로 오갈 수 있다. 우상조 기자

 
윤 공작원은 며칠 동안 내무반에 감금당했다가 끝내 동료들의 몽둥이찜질이라는 어이없는 처벌로 사망했다. 공작원들은 재판도 없이 한낱 부대장의 지시에 의해 사적(私的) 처형에 처한 것이다. 실미도 부대 생존 공작원들은 군사재판에서 등에서 “입소 당시의 선서에 따라 온갖 가혹 행위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본인은 복무 중 고의과실을 막론하고 부대에 해로운 행위를 자행할 경우 어떠한 극형도 감수하겠습니다.”(1968년 5월 ‘실미도 부대’ 창설 당시 공작원 선서 내용 중 일부)

 

"형법 절차 없는 살해는 형사상 범죄행위" 

국가라는 이름으로 공작원에게 가혹 행위를 일삼은 기간병의 행위는 정당화할 수 있을까. 기간병들은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와 면담에서 “하극상을 묵인하면 우리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당시에는 공작원 대부분이 사형수나 무기수 출신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 가혹 행위를 할 때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설령 실미도 부대원들이 사형수나 무기수라고 사적 처벌이 정당화될까. 더구나 실미도 부대원은 일부 행불자나 무연고자가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20~30대 청년이었다. 안김정애 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2과장은 “군 형법 등 적법한 절차 없이 인민재판을 하듯 윤 공작원을 살해한 건 명백한 인권침해이자 형사상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미도 부대에서는 이런 방식의 살인이 윤 공작원 한 명에 그치지 않았다. 다음 회에서 계속.
 
 
※본 기사는 국방부의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2006년)와 실미도 부대원의 재판 기록, 실미도 부대 관련 정부 자료, 유가족·부대 관련자의 새로운 증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심석용·김민중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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