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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전 ‘개구리 암’ 해부···구글·MS 누른 의료 AI 만들었다

1997년 이탈리아 로마의 한 국제학교 9학년 생물학 시간. 개구리 해부 실습 중이던 한 소년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선생님, 이건 뭔가요?" 소년이 가른 개구리의 뱃속엔 영문 모를 혹들이 가득했다. "브랜든, 정말 특이한 개구리를 골랐구나. 그건 암이란다."
 

[인터뷰] 서범석 루닛 대표

23년이 흐른 지금, '암 걸린 개구리'를 해부했던 소년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서울대 의대를 거쳐 암 진단 의료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을 이끄는 수장이 됐다. 서범석(37) 루닛 대표 이야기다.
 
서 대표를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루닛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어쩌면 그때부터 암을 연구할 운명이었나 모르겠다"며 웃었다. 회사 소개서엔 진지한 의학·기술 용어가 가득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서 대표를 보고 "좋은 구경거리 생겼다"며 직원들이 모여드는 사무실에선 유쾌함이 느껴졌다.
 
서범석 루닛 대표가 17일 서울 강남구 루닛 사무실에서 회사 로고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서범석 루닛 대표가 17일 서울 강남구 루닛 사무실에서 회사 로고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AI로 암 정복' 루닛의 꿈

루닛의 비전은 명료하다. 인공지능으로 인류의 숙원인 '암 정복'. 카이스트 힙합 동아리에서 만난 석·박사생 6명이 2013년 창업했다. 딥러닝 기술을 활용해 암 중에서도 가장 발병률이 높은 폐암·유방암의 진단 보조 AI(루닛 인사이트)와 환자의 항암치료제 반응을 예측하는 AI 플랫폼(루닛 스코프)을 개발 중이다.
 
서 대표는 "창업 당시는 '알파고 대란(2016년 3월)' 전이라 딥러닝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공동 창업자들이 모여 미래 기술의 가치를 실현할 분야를 고민하다 1%의 기술력 차이로도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의료 쪽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루닛의 비전은 '인공지능으로 암을 정복한다'다. [사진 루닛]

루닛의 비전은 '인공지능으로 암을 정복한다'다. [사진 루닛]

 
서범석 대표는 의사 출신이다. 백승욱 전 대표와 카이스트 방송반에서 맺은 인연으로 2016년 의학총괄이사(CMO)로 루닛에 합류했다. 이후 의료 현장에서 루닛 제품의 성능을 입증하는 일이 중요해지면서 2018년 가을 대표를 맡았다.
 
합류 당시는 서 대표가 막 가정의학 전문의 자격증을 땄을 때였다. 왜 안정적인 의사의 길을 포기했냐고 묻자 "스타트업의 매력에 홀렸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차없이 짜여진 시스템대로 움직이기보단 직접 주도해서 만든 제품이 전세계에 퍼지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좋았다"고 했다.
 
서범석 루닛 대표이사.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서범석 루닛 대표이사.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AI가 암 진단·치료 도와 생존률 높여

서 대표는 암 정복의 핵심을 '정확한 진단'과 '정확한 치료'로 꼽는다.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할 수 있고, 환자 체질에 따라 바뀌는 암의 특성상 꼭 맞는 치료제를 써야 생존률이 오른다는 것이다.
 
루닛 AI엔 그런 철학이 담겼다. 아산병원, 삼성병원 등 대형병원을 뛰어다니며 얻은 수백만 개의 사례 데이터 덕에 영상의학 전문의의 도움 없이도 폐암·유방암 신호를 97~99%의 정확도로 잡아내고, 각 환자에게 어떤 항암제의 어떤 성분이 효과가 있을지 예측할 수 있다.
 
루닛의 제품.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루닛의 제품.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현재까지 루닛이 받은 누적 투자액은 600억 원이다. 매출 규모(지난해 2억원)를 감안하면, 내세울 제품 하나 없을 때부터 기술력으로 투자를 유치해왔단 얘기다. 매출도 상승세를 타고 있다. 2018년 일본 최대 의료영상장비업체 후지필름과 파트너십을 맺으면서다. 지난 6월엔 글로벌 1위 영상장비업체 GE헬스케어의 흉부 엑스레이에 루닛의 알고리즘을 탑재하는 계약을 맺었다. 업계에서는 루닛 기술이 탑재된 제품의 판매 수수료만 연간 500~600억원에 달할 것이라 예상한다. 
 
서 대표는 "후지필름, GE와의 파트너십으로 세계 엑스레이 시장 40%를 판로로 얻게 됐다. 글로벌 기업 2곳과 계약을 앞두고 있고, 추가 논의 중인 기업도 네댓 곳이다. 매출은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수익 안 나도 기초연구에 투자"

루닛은 다양한 학술·연구활동을 병행하는 연구개발(R&D)형 기업이다. 130여 명의 직원 중 전문의가 7명, AI 전문 연구원이 30여 명인데, 이들이 따낸 국내외 딥러닝 기술 특허만 약 50개다. 연구 결과는 미국암연구협회(AACR) 등 주요 학회에서 발표하고, 각종 국제 AI 경연에도 꾸준히 참가한다. 당장 수익이 나지 않아도 연구에 매진하는 건 "루닛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탄탄한 기초 연구가 받쳐줘야 사업 시야가 넓어지고 성장을 갈구하는 고급 인재를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닛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 [사진 루닛]

루닛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 [사진 루닛]

"대기업은 무섭지 않다"

루닛은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스타트업이다. 글로벌 시장분석기관 CB인사이츠나 스위스 다보스포럼이 선정하는 유망 AI 기업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잦다. 한국 기업 중 거의 유일하다. 지난달엔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 연구소(노벨의학상 선정기관)가 8년간 독자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루닛 AI가 최고 성능을 보였다는 내용이 권위있는 암 학술지 '자마 온콜로지(JAMA Oncology)'에 실렸다. 세계적인 의학 저널 '란셋(The Lancet)'에도 최근 루닛 연구 논문이 게재됐다. 서 대표는 "권위 있는 제3자들이 루닛을 높게 평가해주어 뿌듯하다"고 했다.
 
지난 5년간 참가했던 AI 경연대회에선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IBM·삼성전자·하버드 의대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여러 차례 제쳤다. "좁은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키기엔 빠르고 유연한 스타트업이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의료 AI가 여러 부대 사업 중 하나인 대기업은 무섭지 않다. 오히려 잔뜩 동기부여된 전문 인력이 규제나 조직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일에 집중하는 스타트업들이 더 무섭다"고 했다.
 
의료 AI 스타트업 ‘루닛’은.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의료 AI 스타트업 ‘루닛’은.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의료 AI, 의사 대체할까

세계 의료 AI 시장은 올해 49억 달러(6조원)에서 2026년 452억 달러(53조원)으로 성장할 전망이다(마켓앤마켓). AI가 의사를 대체하는 세상이 올 것 같냐 묻자, 그는 늘 고민해온 문제라는 듯 "진찰·검사를 통해 질환과 치료법을 찾아내는 의료 행위 자체가 본질적으로 데이터에서 출발했다. 첨단 기술로 얻을 수 있는 데이터가 급증한 세상에서 AI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혹은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복잡한 혁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 대표는 "AI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겠지만 최종 판단은 여전히 의사의 몫이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 어떻게 다녔나 싶지만, 결국엔 어디로 갈 지 방향을 정하는 건 운전자인 것처럼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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