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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 탁현민이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의 철학 빈곤 논쟁으로 한때 시끄러웠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지난 6월 “남이 써준 연설문 읽고, 탁현민(청와대 의전비서관)이 해준 이벤트 하는 의전 대통령”이라고 비판한 게 도화선이 됐다. “철학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청와대 전직 참모들이 반박이라고 한게 진 전 교수의 주장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직접 연필로 가필한다”(최우규 전 연설기획비서관)거나 인쇄된 연설문 원고를 고치고 있는 문 대통령 사진을 SNS에 올려(윤영찬 더불어민주당 의원, 전 국민소통수석) 결과적으로 대통령을 원고 교정보는 사람 수준으로 희화화한 탓이다.
 

탁, 청와대 행사마다 “내 연출”
대통령을 무대 위 배우로 만들어
참모가 자초한 ‘철학 빈곤 논란’

재밌는 건 “남이 써준 걸 읽는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하승창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라는 식으로 모두 콕 집어 연설문에는 발끈했지만 ‘탁현민의 의전’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터무니없는 반박조차 못 했을까. 지난 19일 제1회 청년의날 기념식에서 그 의구심을 일부 풀 수 있었다.
 
대통령이 37번이나 언급할 만큼 이날 행사를 관통하는 메시지인 ‘공정’ 이슈에 대해 탁 비서관은 SNS에 자신이 연출자라는 걸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고민이 많았다”며 본인의 청년 시절까지 소환했다. 대통령 행사이고, 탁 비서관은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좀 더 돋보이도록 구현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정상적인 대통령과 참모 관계라면 탁 비서관은 국민 눈엔 아예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행사 당일에 마치 본인이 대통령인양 “메시지를 고민했다”고 떠벌리고, 행사에 참석한 BTS가 대통령에 전달한 선물을 놓고도 “나의 선물”이라고 생색을 냈다. 반면 이날 문 대통령 SNS는 단순했다. ‘정부는 기회의 공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청년들은 상상하고, 도전하고,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주기 바랍니다.’ 두 SNS만 놓고 보자면 탁 비서관이 지휘관이고 대통령은 그저 연출가의 의도를 충실히 구현해낸 무대 위 배우일 뿐이다.
 
사실 이 날만이 아니다. 지난 12일 정은경 초대 질병관리청장 임명식 수여식도 그랬다. 대통령은 이날 SNS에 “청와대 바깥에서 고위 정무직의 임명장 수여식을 갖는 것은 처음”이라며 “청 승격의 주인공들과 함께 초대 청장 임명장 수여식을 하는 것이 더 뜻깊은 일이라 생각했고 정 본부장 희망도 그러했다”고 썼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탁 비서관은 본인이 고민한 결과라고 또 자랑을 했다. “권위를 낮출수록, 형식을 버릴수록, 의례를 간소화할수록 권위가 더해지고 형식이 공감을 얻으며, 의례는 감동을 준다. 임명장 수여식도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망치가 되어 또 한 번 나를 때린다. 그래서 또 고민이 깊어진다.”
 
일반 국민은 코로나19로 인한 실내 집합 금지 조치로 결혼식조차 못 하고 있는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일하는 곳에 가서 방역 방침을 어겨가며 직원을 한자리에 모아놓고는 국민더러 감동까지 강요한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권위가 깃들어 있어야 할 대통령이나 그간 노고를 인정받아 큰 역할이 주어진 정 청장 모두 그저 탁 비서관이 만들어낸 작품 속 배우로 전락시킨다는 점이다. “내가 이 작품의 연출가”라며 작품의 탄생 배경을 설명한다면, 결국 그 무대에 선 사람은 연출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배우의 연기가 출중해도 송강호나 조여정의 ‘기생충’이 아니라 봉준호의 ‘기생충’인 것처럼.
 
탁 비서관은 왜 이러는 걸까.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 비판대로 나르시시즘에 취해 이런 불경을 저지르는 것인가. 아니면 대통령을 배우처럼 부리는 것인가. 뭐든 간에 지금 청와대는 탁현민 효과로 그림자에 머물러야 할 참모들이 자꾸 전면으로 소환된다. 전공의 파업 와중에 문 대통령이 의사와 간호사를 갈라놓는 SNS를 올려 문제가 되자 “대통령 본인이 직접 쓴다”던 주장은 쑥 들어가고 서서 하는 연설은 누구, 앉아서 하는 건 또 누구 식으로 참모 이름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통신비 지원 때도 처음엔 대통령이 “정부의 작은 정성”이라며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더니 논란이 되자 당·청이 서로 손가락질하며 대통령 흔적을 지워버린다. 대통령의 방패를 자처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위신만 깎아내리는 행태다. 이러니 대통령의 말이나 행보에 무게가 실릴 수 없고, 철학 빈곤 소리가 나온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작성하지 않아도 혼이 담기지 않은 연설문이 없었다”며 “핵심은 표현이 아니고 콘텐트”라고 했다. 과연 지금은 어떤가. 온 국민이 다 아는 걸 탁현민식 감성팔이에 젖은 청와대만 모르는 것 같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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