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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중력을 거스르며 이룬 관악산 육봉 등반 사건

기자
윤경재 사진 윤경재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69)

하늘 무늬를 새긴 열 길 바윗길을 알아야 한 길 사람 속도 보인다. [사진 pixabay]

하늘 무늬를 새긴 열 길 바윗길을 알아야 한 길 사람 속도 보인다. [사진 pixabay]



열 길 바윗길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늘 직선일까
 
궁금하다면 마주쳐보라
손짓하는 관악산 육봉
직선으로 끌어내리려는 중력의 질서
그 거룩한 미련을 거슬러
한 줌의 거리만큼 맨몸으로 기어오른다
 
한 몸뚱이에 네 지체 많아 보여도
한 번에 한 동작뿐
왼손 부여잡고 오른발로 받침대 찾으니
자만의 변신은 자벌레
오른손 뻗어 마음 삐친 꼬투리라도 확보하고
만물의 영장이란 오만을 지탱해주는 돌 틈새에
죄지은 왼발을 겸연히 끼운다
왼손 다음 오른발, 오른손 기다려 왼발
지겨울 새 없이 갈지자 몸짓을 버둥거려야
겨우 산다
 
내 삶은 도마뱀
사라진 환부가 환상통처럼 꿈틀댄다
언제나 빈손엔 의심이 붙을 새가 없다
나란 허무마저 더뎌지고
몸 깊숙이 암장된 파충류의 기억을 꺼내
경계 너머로 벽과 만나 그 은미한 소리를 듣는다
바위와 몸이 내는 신음을 메아리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부딪쳐보라
 
하늘 무늬를 새긴
열 길 바윗길을 알아야 한 길 사람 속도 보인다
 
해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바위로 이루어진 암릉 등반은 밑에서 보면 루트가 훤히 보이는데 막상 바위에 매달려보면 그렇지 않다. 자기 발과 손을 안전하게 지탱해줄 꼬투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암벽에 매달려서는 점프가 불가능하기에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를 나가기 위해서는 부단히 다음 지점까지 생각하면서 갈지자 행보를 해야 한다. 그것도 왼손→오른발→오른손→ 왼발의 순서를 철저히 지켜야 안전하고 능률적이다. 이 질서를 깨뜨리면 돌아오는 대가가 크다.
 
암릉 등반은 어떤 도구나 생명줄 도움 없이 오로지 맨손과 발의 힘으로 바위를 타는 운동이다. 흔히 릿지(Ridge)라고 부른다. 미끄러지지 않고 잘 달라붙는 밑창을 구비한 릿지화만 갖추면 누구나 도전해 볼 수 있다. 경험이 풍부한 리더의 지도 아래 자기 수준에 맞게 오르면 된다. 대담성과 침착함, 간절함과 겸손을 만끽할 기회가 열린다. 무모한 아집과 만용은 안전과 생명에 직결되니 애당초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암릉 등반은 보이는 것과 실제가 전혀 다른 점에서 인생을 그대로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몸을 사용해 중력을 거슬러가며 조금씩 위로 전진하는 즐거움이 크다. [중앙포토]

암릉 등반은 보이는 것과 실제가 전혀 다른 점에서 인생을 그대로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몸을 사용해 중력을 거슬러가며 조금씩 위로 전진하는 즐거움이 크다. [중앙포토]

 
관악산은 험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라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렀다. 멋진 릿지 코스가 곳곳에 있다. 특히 여섯 개의 암릉 봉우리가 줄지어 나타나는 육봉 코스는 초보자부터 중급자까지 릿지를 맛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봉우리에 오르면 구불구불한 노송이 분재처럼 기묘하게 자라나 등반객을 맞는다. 척박한 바위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기상 넘치게 선 소나무 그늘아래 땀을 식히며 올라온 길을 굽어보는 맛이 일품이다. 육봉 코스는 정남향이라 늘 햇볕을 가득 받아 멀리서 보면 반짝이는 보석 같은 느낌이 든다. 추운 겨울에도 바위에는 온기가 남아 있다.
 
암릉 등반은 보이는 것과 실제가 전혀 다른 점에서 인생을 그대로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몸을 사용해 중력을 거슬러가며 조금씩 위로 전진하는 즐거움이 크다. 어떤 작은 성취감보다 삶의 지혜를 깨달았다는 자족감을 준다. 평지에서와 다른 삶의 규칙이 엄연히 존재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관악산 육봉을 릿지로 등반한 날은 내게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왔다. 사건이란 그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는 생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그 이전과 이후가 결코 같을 수 없는 분기점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사고와는 전혀 다르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떠올리며 술과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전신화상을 입어 자신보다 더 흉한 꼴로 사회에 나서서 봉사를 베푸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를 통해 어쩌면 자신의 지금 상태가 그보다는 훨씬 낫고 행복할 수 있겠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체험을 글로 써 문학작품으로 승화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해가 가면서, 내 불구가 현실이 되어가면서, 나는 나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나는 산모처럼 살았다. 정신을 잉태했고, 정신을 내 감각들로 젖 먹였다.”
 
누구에게나 어느 민족에게나 불행한 사고는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을 사건으로 승화사키는 일은 또 다른 어려움이요 삶의 지혜이다.
 
사실 내 몸의 주인이 나 인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내 몸에는 내 의식으로 포착하지 못할 수 없는 것,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되는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몸 안에 침범했을 때 면역계의 T-cell이 나서서 항원을 억제하고 죽이는 역할을 자동적으로 실행한다. 만약 T-cell이 외부 침입자를 잘 가려내지 못하거나 효과적으로 죽이지 못하면 우리 몸은 병들고 생명을 잃게 마련이다.
 
인간은 유성생식으로 후손에게 자기 유전자를 물려준다. 그런데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배우자를 만나게 되면 유전자는 다양성을 잃어 다양한 외부 침입자에 대항하는 능력이 약해진다. 경험이 적어 정보가 빈약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친족 간의 결혼을 타부했다. 한 사람의 고유성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우주의 천체 수보다 작은 확률이라고 한다. 한 개인의 단독성이 존귀한 셈이다. 그만큼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당신이 나와 다른 사람(개체)이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내 몸의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라 생명이며 존재 원리다. 나의 능력과 욕망의 괴리를 받아들이고 감내할 수 있는 자만이 거룩한 미련인 중력을 거슬러 하늘의 무늬를 음미할 수 있다. [사진 pixabay]

내 몸의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라 생명이며 존재 원리다. 나의 능력과 욕망의 괴리를 받아들이고 감내할 수 있는 자만이 거룩한 미련인 중력을 거슬러 하늘의 무늬를 음미할 수 있다. [사진 pixabay]

 
우주의 법칙은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를 열역학 제2법칙 또는 엔트로피 증가법칙이라 부른다. 그런데 생명현상은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음의 방향성’을 갖는다. 즉 생명이란 에너지를 사용하여 일정기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걸 말한다. 그것도 다른 무엇인가와 만나고 부딪혀 질서를 창조한다. 사람에게 그런 만남의 장소가 바로 몸이다. 몸은 나라는 의식에 갇혀 지내는 곳이 아니라 존재와 우주가 교차하는 만남의 장소이다. 인간에게는 생각과 감정, 오감 이외에 존재함이라는 또 다른 힘이 엄연히 작동하고 있다. 우리 몸은 생명의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장이다.
 
사람의 몸 안에는 1만여 종이 넘는 미생물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몸은 타자의 공동체이다. 이 말은 우리 몸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말이다. 타자들이 어떤 때는 나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이방인으로 작용해 해를 주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자기 몸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알 수 있다. 자기가 자기 몸의 주인이라는 건 어쩌면 큰 착각이다.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면이 있음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게 정답이다. 하물며 타인에게 자기와 다르니 틀렸다고 말하거나 나를 따르라고 강요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을 편 가르고 자기를 따르라고 강요한다.
 
내 몸의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라 생명이며 존재원리다. 그러니 함부로 나대지 말아야 한다. 나의 능력과 욕망의 괴리를 받아들이고 감내할 수 있는 자만이 거룩한 미련인 중력을 거슬러 하늘의 무늬를 음미할 수 있다. 욕망이 크다면 먼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능력을 키워야 하고 ‘음의 엔트로피’ 즉 질서를 창조하는데 매진해야 한다. 하늘의 무늬와 음의 엔트로피는 다른 말로 사랑이다. 예를 들면 길가의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음의 엔트로피’를 이룩하는 일이다. 아예 무질서의 대명사인 쓰레기를 최소한으로 배출하려 노력하는 게 더 좋다.
 
지금 인류는 미증유의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 소리가 무얼 말하는 지 알아들어야 한다. 먼저 각자 욕망을 줄이고 타자를 받아들이며 각자가 제 몸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타인과 만물에도 주인으로 행사해서는 안 된다. 만물이 곧 나의 형제임을 받아들이며 같이 공존하는 길을 찾아야 할는지 모르겠다.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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