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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평등 이념으로 공정 진압했다, 결국 우린 다 잃었다"

37번이나 ‘공정’ 언급한 문 대통령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공정은 촛불혁명의 정신이며, 우리 정부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입니다.” 지난 토요일 청년의 날 기념식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날 대통령은 ‘공정’이라는 말을 37번이나 입에 담았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조국·추미애 사태 이후에도 태연히 ‘공정’을 말하다니, 어디 딴 세상에 사시는 분 같다. 유체이탈을 해 극성스런 지지자들 데리고 저 ‘달’나라로 이주를 가신 모양이다.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젊은 세대, 입시·병역·취업 둘러싼 ‘공정’ 이슈에 민감
평등주의 이념 586과 달리 능력주의 자연스럽게 여겨
자기들도 믿지 않는 평등 사회 약속, 절차의 공정 무시
공정 요구를 ‘평등사회 가로막는 수구세력 전쟁’ 여겨

이벤트에 무너진 공정
 
젊은 세대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세 가지 이슈가 있다. 입시·병역·취업이 그것이다. 그중 조국 사태(입시)와 추미애 사태(병역)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는지, 대통령은 오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만 언급했다. “때로는 하나의 공정이 다른 불공정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이 사안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을 해소’하려는 정부의 선의가 있었다는 얘기다.
 
선의는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전시 행정이었다. 그저 카메라 앞에서 ‘비정규직을 챙기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연출할 생각에 거시적이고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이 요구되는 중요한 노동정책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발표해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노조와 노조가 부딪히고, 정규직 전환자와 취업준비생이 서로 반목하게 됐다. 심지어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탈락해 애먼 일자리만 잃은 이들까지 생겼다.
 
아무리 생각 없는 말이라도 그 말이 대통령에게서 나왔다면 지켜져야 한다. 그 뒤치다꺼리는 구본환 사장이 맡았다. 하지만 현행 법규상 직고용은 불가능하니, 이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하려면 편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결국 그 책임은 구 사장이 혼자 뒤집어쓰고 말았다. 잘못은 청와대에서 저지르고 책임은 애먼 사람이 지게 된 셈이다. 이것이 문재인 정권의 공정이다.
 
당시 민주당의 김두관 의원은 공정을 이유로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취준생들을 크게 꾸짖었다. “조금 더 배우고 정규직 됐다고 비정규직보다 2배가량 임금을 더 받는 것이 오히려 불공정이다.” 전형적인 586의 마인드다.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전통적인 평등주의의 반론. 딱히 틀린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취준생들의 분노를 가슴으로 느끼지도, 머리로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데에 있다.
  
과정만은 공정해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오전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제1회 청년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오전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제1회 청년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요즘 젊은 세대는 ‘공정’의 화두에 민감하다. 평등주의(egalitarianism) 이념을 가진 586세대와 달리 그들은 능력주의(meritocracy)를 자연스럽게 여긴다. 이대생들의 평생교육 단과 대학 반대 시위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아이스하키 단일팀 반대, 사법시험 폐지 반대, 인국공의 정규직 전환 반대, 최근에 일어난 젊은 의사들의 공공의대 반대 파업의 바탕에는 이 능력주의 마인드가 깔려 있다.
 
그들은 누군가 선발시험을 보지 않고 이대생이 되고, 의대생이 되고, 판·검사가 되고, 국가대표가 되고, 공사의 정직원이 되는 것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긴다. ‘조금 더 배우고 정규직 됐다고 비정규직보다 2배가량 임금을 더 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불공정’이 아니다. 성적에 따른 차별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에게 불공정은 시험도 안 치른 이들이 정규직과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것이다.
 
평생단과대학을 허용하면 이대 졸업장의 가치가 떨어진다. 공공의대를 허용하면 의사의 ‘퀄리티 컨트롤’이 망가진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이들의 특권은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특권과 별 관계 없는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학교의 토론수업에서 이른바 ‘스카이 캐슬’의 부당한(?) 특권을 비판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걔들은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했잖아요.”
 
젊은 세대에게는 아예 평등에 대한 기대가 없다. 그들에게 출발 조건의 불평등은 ‘운명’이다. 경쟁의 결과로 발생한 불평등은 ‘정의’다. 그러니 아직 통제 가능한 것은 오직 ‘과정’뿐. 그래서 그 과정의 공정이라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으로 쟁취한 특권은 맘껏 누려도 되는 보상이고, 공정한 경쟁에 져서 안게 된 차별은 군말 없이 치러야 할 죄과인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평등주의 대 능력주의
 
그것은 산업이후사회와 관련이 있다. 정보혁명의 시대에 들어와 ‘창조적 엘리트’의 경제적 역할이 과거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무 고정자본 없이 무형의 발상만으로 엄청난 부를 창출하는 이들. 그 소수가 ‘살찐 고양이’가 되어 일반 노동자의 수백, 수천 배의 보수를 받아도, 그 불평등은 그들의 혁신 덕에 사회 전체가 누리게 된 혜택으로 간단히 상쇄된다. 이는 전통적인 진보주의의 위기를 의미한다.
 
민주당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욕망을 과거 산업혁명기에 형성된 평등주의 이념으로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가령 조국 전 장관은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며 “중요한 것은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젊은 능력주의 신봉자들에게 이런 말은 그저 ‘개천 환경을 개선할 테니 영원히 가붕개로 살라’는 저주로 들릴 뿐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본인의 가치와 아이의 행복이 충돌할 때 결국 아이를 위해 양보하게 되더라”고 토로한 바 있다. 그가 문서까지 위조해 가며 제 딸을 용 만들려고 한 것은 개천의 가붕개로는 ‘행복’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결국 가붕개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이란 저 자신도 믿지 않는 구호였던 셈이다. 승천의 꿈을 포기한 대가로 주겠다던 그 알량한 평등마저 위조였으니 분노할 수밖에.
 
20대가 입시·병역·취업의 문제에 민감하다면, 바로 윗세대의 아킬레스건은 부동산이다. ‘부동산 3법’이 통과됐을 때 그 튼튼하던 30~40대의 대통령 지지율마저 흔들렸다. 다른 이슈들에서는 관대했던 그들도 집 사는 문제에 관련된 ‘공정’만은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30~40대도 이미 ‘집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욕망은 ‘내 능력으로 집을 살 수 있는 세상’에 있다.
 
청와대 수석부터 똘똘한 한 채는 포기 못 한다. 진실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에 있음을 대중은 안다. 믿을 것은 평등을 약속하는 정부의 말이 아니라 불패를 자랑하는 부동산의 신화. 30~40대에게 ‘집 없이도 행복한 세상’이라는 구호는 윗세대들의 기득권 굳히기일 뿐이다. 행복은 강남의 아파트에 있는데, 자기들은 일찌감치 강남에 행복을 마련해 놓고 우리만 못 사게 하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놈의 공정
 
어느 진보 지식인의 말은 공정의 화두를 대하는 정권과 지지층의 멘탈리티를 잘 보여준다. “이게 왜 불평등의 문제와 관련되는지, 왜 검란이나 의란을 제압하지 못하면 사회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지, 그놈의 ‘공정’의 문제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정치가 어떻게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인지, 그 전쟁을 어떤 인간들이 일으키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이 더러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한 마디로 ‘어떤 인간들’이 평등이라는 신성한 대의에 대항해 ‘그놈의 공정’을 앞세워 ‘더러운 전쟁’을 일으켰다는 얘기다. 공정의 지배를 그는 ‘능력의 전제·횡포(the tyranny of merit)’로 규정한다. 근데 왜 평등을 위해 절차의 공정이 희생돼야 하나? 유력자의 딸이 시험 한번 없이 의사가 되는 게 평등인가? 수사 잘하는 검사 좌천시키고 아부 잘하는 검사가 승진하는 게 평등인가?
 
자기들도 믿지 않는 평등의 위선. 명분을 쥔 자신들이 정의라는 독선. 절차의 공정을 무시하는 반칙과 특권. 이 못된 짓에 이의를 제기하면, 그들은 그것을 진압해야 할 반란으로 여긴다. 그들에게 공정의 요구란 평등사회를 가로막는 수구세력의 ‘더러운 전쟁’일 뿐. 이념적 착란과 군사주의 마인드가 겹쳐 공정에 관한 논의는 졸지에 ‘능력의 전제·횡포’에 맞서는 아마겟돈의 결전이 되었다.
 
그 모든 “불공평은 조국 후보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계층구조와 입시제도가 만든 것”(조국백서)이란다. 그래서 입시제도를 바꾸는 교육개혁(?)이 이루어졌다. 서 일병의 휴가는 규정에 따랐단다. 그 덕에 여친의 카톡으로 휴가 연장이 가능하게 국방개혁(?)도 이루어졌다. 이것이 그들의 ‘개혁’이다. 허구의 평등으로 그들은 공정을 진압했다. 그 덕에 우리는 평등도, 공정도 없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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