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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인사이드]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숨겨진 비밀

기자
남도현 사진 남도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와 참모들 [중앙포토]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와 참모들 [중앙포토]

 
지난 15일은 인천상륙작전 전승 70주년 기념일이었다. 1950년 9월 15일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물꼬를 일거에 틀어버린 전환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맥아더가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작전을 성사시켰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참모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작전을 반대했다. 서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극심한 곳이라는 점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밀물 시간에만 맞춰 상륙해야 하므로 어려운 작전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원론적으로 맞지만 조금 잘못 알려진 부분이다. 엄밀히 말해 조석 차이가 심한 것은 상륙이 어려운 이유로 보기 힘들다. 서해안 해수욕장에서 수영해 봤던 이라면 알겠지만, 설령 썰물이라도 해안가 멀리까지 나가면 수영을 할 수는 있다. 따라서 단순히 생각해 간조기에 상륙이 이루어진다면 해안가에서 좀 더 진격을 많이 하면 된다. 그렇다면 굳이 밀물 때를 맞춰야 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난 15일 인천해역방어사령부 대원들이 인천상륙작전 전승 70주년을 맞아 인천시 중구 월미도공원에 세워진 인천상륙작전(상륙지점, 녹색 해안)기념비를 닦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장소에서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1950년 당시에는 바다였다. [뉴스1]

지난 15일 인천해역방어사령부 대원들이 인천상륙작전 전승 70주년을 맞아 인천시 중구 월미도공원에 세워진 인천상륙작전(상륙지점, 녹색 해안)기념비를 닦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장소에서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1950년 당시에는 바다였다. [뉴스1]

 
현재 월미도 선착장 부근에 가면 유엔군이 최초로 상륙한 역사적인 장소인 ‘녹색 해안’을 알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잘못된 곳에 설치한 것이다. 월미도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삼각형 형태임을 알 수 있는데, 인천과 연결된 제방의 북쪽에 바깥으로 길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지금은 일대가 모두 매립돼 공장 지대로 바뀐 바로 이곳이 선봉대인 미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가 상륙한 녹색 해안이다.
 
그런데 최초 상륙부대가 월미도 전체를 감시하는 월미산을 신속히 점령하려면 월미도와 소(小) 월미도를 연결하는 남서쪽 제방(현재 인천항 갑문)으로 상륙한 뒤 정상으로 진격하는 것이 가장 유리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섬의 외곽이고 월미산에서 가장 먼 거리라 할 수 있는 녹색 해안으로 상륙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우선 녹색 해안이 군사적으로 급소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1946년 미군정에서 발행한 인천항 인근 지도. 유엔군 선봉대는 월미도 북쪽에 튀어나온 녹색 해안에 상륙을 감행했다. 지리적으로 제방을 쉽게 차단하여 섬을 고립시킬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지만, 인천항 인근의 유일한 백사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군]

1946년 미군정에서 발행한 인천항 인근 지도. 유엔군 선봉대는 월미도 북쪽에 튀어나온 녹색 해안에 상륙을 감행했다. 지리적으로 제방을 쉽게 차단하여 섬을 고립시킬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지만, 인천항 인근의 유일한 백사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군]

 
녹색 해안 동쪽에는 도심과 연결되는 방파제가 있다. 이곳 초입을 제압하면 월미도가 자연스럽게 육지로부터 고립된다. 즉 녹색 해안은 가장 빨리 상대의 퇴로이자 보급로를 차단하여 섬 전체를 제압할 수 있는 위치다. 하지만 월미도를 외부와 단절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오후에 미 해병 5연대 본진이 상륙한 인천역 부근의 ‘적색 해안’을 먼저 제압해도 된다. 오히려 항만과 철도를 신속히 확보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적색 해안이 더 유리해 보인다.
 
그런데도 녹색 해안에 먼저 상륙한 것은 인천 일대의 특수한 바다 환경 때문이다. 의외로 인천에 오래 산 이들도 모르는 사실인데, 녹색 해안은 인천항 인근에 있던 유일한 백사장이었다.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 조석 차이보다는 인천항 일대에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 상륙에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상륙부대라도 갯벌에 빠지면 방어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단지 손쉬운 사격 표적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은 매립되어 사라진 해안 백사장. 뒤의 건물이 바닷물을 데워 사시사철 이용이 가능한 조탕이고 그 외 야외 풀장, 동물원, 호텔, 식당 등이 완비되어 있었다. 6ㆍ25전쟁에서는 전쟁의 물고를 바꾼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인천시]

지금은 매립되어 사라진 해안 백사장. 뒤의 건물이 바닷물을 데워 사시사철 이용이 가능한 조탕이고 그 외 야외 풀장, 동물원, 호텔, 식당 등이 완비되어 있었다. 6ㆍ25전쟁에서는 전쟁의 물고를 바꾼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인천시]

 
그래서 인천은 갯벌이 모두 잠기는 밀물 때에나 상륙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군사 작전은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작성하여야 한다. 불가피하게 물때를 놓쳤을 경우를 대비하여 상륙 목적지 부근의 유일한 백사장인 녹색 해안이 우선 점령 목표가 된 것은 너무 당연했다. 설령 불가피한 이유로 썰물이 되더라도 백사장에서는 계속 상륙을 할 수 있고 그만큼 위험도 상대적으로 덜하다.
 
그런데 녹색 해안은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도 함께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일대에는 1927년 만철(滿鐵)의 주도로 건립된 대규모 위락시설이 존재했었다. 종종 현재의 월미테마파크와 혼동하는 자료도 있는데 전혀 다른 곳이다. 해수욕장은 물론 풀장, 바닷물을 데워 사시사철 이용이 가능한 조탕(潮湯)·동물원·호텔 등으로 구성된 당대 극동 최고의 워터파크였다. 일본과 만주에서도 단체 관광객이 찾아올 만큼 유명했다.
 
문제는 주로 우리를 지배한 일본 관료와 거주민들의 위락을 위해 쓰였다는 점이다. 해방 후 계속 운영하려 했으나 국내에서 이를 이용할 정도로 여유 있는 이들이 드물어 방치되었다가 6·25전쟁 이후 인천항이 확장되면서 결국 사라졌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처럼 월미도 백사장은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매립되어 사라지면서 그와 관련된 역사적 기억마저 함께 잊혀 가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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