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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탄이 발뒤꿈치 박혔다, 지옥문이 열렸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탕탕탕!”


굵은 기관총 실탄은 발뒤꿈치를 노렸다. 잔가지가 얼굴을 따갑게 치며 눈을 찔렀다. 탕탕탕! 푹-! 등 뒤에서 바짝 들리던 동료의 거친 숨소리가 멈췄다. 그 순간 힘이 풀린 다리를 잔뿌리가 감아챘다. 누군지 궁금했지만 되돌아볼 엄두를 못 냈다. 그저 언제 내 발목도 날아갈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죽자사자 등성이를 향해 내달렸다. 머릿속엔 ‘한 발만 늦으면 나도 죽는다’는 두려움뿐이었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⑤]가혹행위로 얼룩진 훈련

 

'68년 5월: 지옥의 문 열린 실미도!

1968년 5월. 인천의 작은 섬, 실미도에 지옥의 문이 열렸다. 실미도 부대에 입소한 공작원 31명을 기다린 건 ‘인간병기’ 조련을 위한 지옥훈련뿐이었다. 기간병들은 공작원들에게 북파 공작에 필요한 산악 구보, 장애물 넘기, 외줄 타기, 해상 침투, 위장 등의 훈련을 반복시켰다. 기간병들은 훈련마다 ‘더 빨리’를 외치며 기관총으로 위협 사격을 가했다. 단순한 위협에 그치지 않았다. 산악 구보 중 황철복 공작원은 총알에 옆구리 관통상을 당했다. 김창구·이서천 공작원은 안전장비도 없이 외줄 타기를 하다 추락해 머리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백사장에서 훈련을 하는 날은 바닷가로 끌려가 물속에서 군홧발로 짓밟히기 일쑤였다. 훈련 성적이 저조한 공작원은 바위 위에 세워진 채 위협사격을 받기도 했다.  
 

“몽둥이찜질과 주먹질, 발길질 등을 당해 공작원들은 거의 다 골병이 들었습니다. 훈련을 못 한다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기합 또는 폭행을 당했습니다. ”(김병염 공작원 등 재판기록)

 

“제식 훈련을 할 때 발만 틀려도 침대봉으로 머리를 폭행했습니다. 한 대만 내리쳐도 머리가 갈라져 피가 흘렀고 의무병이 꿰맸습니다.”(기간병 김모씨·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

2003년 5월 1일 찾은 실미도의 영화 세트장. 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중앙포토

2003년 5월 1일 찾은 실미도의 영화 세트장. 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중앙포토

 

공작원에겐 가혹행위, 기관병도 구타당해

실미도에서 훈련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가혹 행위는 빈번했다. 실미도에서 기간병은 반말, 공작원은 존댓말이 원칙이었다. 공작원 중 최고령자(36)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김병염 공작원은 뚜렷한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해 고막이 터졌다. 공작원들은 화장실이나 세면실 등에서 24시간 내내 실탄을 장전한 총을 가진 기간병의 감시를 받았다. 또 교육대장은 공작원을 더 강하게 훈련하겠다며, 공작원들이 보는 앞에서 교관과 기간병들을 구타하기도 했다. 
 

“메밀을 수확하다 공작원 2명이 손을 뒤로 묶인 채 발길질을 당하면서 잡혀가는 걸 봤습니다.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하면 또 발로 차고 때리고 하는 걸 본 동네 부녀자들은 ‘군대 간 아들이 생각난다’며 모두 울었습니다.”(무의도 주민 윤모씨·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면담)

 

산악구보·폭파·위장·해상침투…반복 또 반복

실미도 부대의 엄한 군기와 혹독한 훈련은 북파 공작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였다. 실미도 부대는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1968년 1월 21일)에 대한 보복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부대 운영자들은 강한 군기와 훈련만이 임무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봤다. 그래야 살아올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실미도 공작원의 하루는 오전 4시 30분 시작됐다. 기상과 함께 구보와 PT 체조를 했다. 오전 8시부터 구보, 줄타기, 산악행군 등이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오후 6시 10분부터는 정신 무장이나 북한 위장 행동 요령 같은 내무반 교육이 9시 30분까지 계속됐다. 10시 취침. 국방부가 1971년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68년 5월 10일 입소 이후 12주간 총 14과목, 520시간의 교육이 진행됐다. 이 중 사격이 150시간으로 가장 많았다. 종합훈련(63시간), 폭파(44시간), 산악훈련(48시간) 등이었다. 북파 공작 시 위장을 위한 인민군식 제식훈련도 포함돼 있다.
 

“공작원들은 카빈총 1정과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 1정을 받아 썼습니다. 평소 훈련 때는 북한군같이 자동소총을 사용하고 비상시에만 국군처럼 카빈총을 썼습니다. 북한에 침투해 인민군으로 위장하고 싸울 때 그들이 쓰는 총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입니다.”(임성빈 공작원· 재판기록)

영화 ‘실미도’ 세트장. 중앙포토

영화 ‘실미도’ 세트장. 중앙포토

 

개밥 훔쳐 먹고 뱀 잡아 배 채워

실미도 부대는 끼니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는 열악한 처우를 받았다. 공작원은 부대에 지원할 때 “월급으로 ‘600불(18만원가량)’을 받는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이 약속은 3개월 만에 거짓말로 드러났다. 5월 입소 후 3개월간은 매달 3200원의 봉급을 받았다. 당시 병장 월급 900원(1970년 기준)에 비해선 4배에 가까웠다. 하지만 3200원은 당시 물가로 라면 160봉지를 살 수 있는 금액에 불과했다. 3개월이 지나서는 이마저도 완전히 끊겼다. 봉급뿐 아니라 급식이나 보급품도 점점 줄었다. 실미도 부대의 보급품이 열악해지면서 공작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부대 내 개밥을 훔쳐먹거나 산에서 뱀을 잡아먹는 공작원이 늘었다. 교육대장은 “우리나라는 식량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니 잘 먹을 수 없다. 인내력을 길러야 한다”고 방치했다.
 

“입대 후 1개월 동안은 쌀밥에다 쇠고깃국, 계란도 한 개씩 줬습니다. 그 후부터는 고깃국은 없었고 된장국이나 소금국에 보리밥을 줬습니다. 1970년 8월쯤부터는 수제비 또는 보리밥, 소금국 등으로 더 나빠졌습니다. 1971년 7월쯤부터는 밀밥만 나왔고요.”(이서천 공작원 재판기록)

 

‘김신조 부대’ 뛰어넘는 ‘인간병기’ 완성

공작원의 침투 폭파 역량은 일취월장했다. 아침마다 실미도 해안 1.5㎞를 3회 구보했고 야간에 공중침투방법인 기구 타기도 능숙해졌다. 부대 입소 6개월 만에 공작원들은 산악 6㎞ 구간을 김신조 부대 이동 속도보다 1분 빠른 26분에 완주했다. 해상에서는 5㎞를 1시간 만에 전진했다. 사격 명중률도 100%에 근접했다.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서 구르면서도 교관이 공중으로 던진 깡통 여러 개를 전부 명중시키곤 했다. 실미도 부대 입소 1년 만인 1969년 5월엔 군부대의 경계를 뚫고 서울 오류동~경기 수원시 간(25㎞), 오류동~경북 의성군 간(210㎞) 침투에 성공하기도 했다. 
 
실미도에서 열악한 처우에 시달리면서도 지옥훈련을 이겨낸 공작원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 모가지를 딸 날’이 머지않았다고 기대했다. 드디어 1969년 10월 실미도 부대는 북한을 향해 출발한다. 다음회에 계속.
실미도는 원래 무인도가 아니었다
실미도 부대가 창설될 당시 섬에는 부부와 아들 2명으로 구성된 1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 1명(5살 추정)이 실미도 부대 초소에 놀러갔다가 초병 김모씨에게 “총을 보여달라”고 하면서 장난을 쳤다. 이 과정에서 총이 의도치 않게 발사됐고, 아이는 머리에 총알을 맞아 즉사했다. 이후 군은 유가족에게 쌀 8가마를 주며 합의했고,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3년가량 뒤 실미도 부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으면서 섬은 무인도로 남겨졌다.
※2006년 발표된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심석용·김민중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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