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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정치적 열광과 냉소 사이에서

정치 참여의 스펙트럼

생각의 공화국

생각의 공화국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다음과 같은 작자 미상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느긋하게, 헤엄치듯, 그럭저럭 세월을 마치는 것, 그것이 지혜로다(優哉游哉, 聊以卒世, 知也.).” 그렇다면 편식을 하지 않고, 이빨을 잘 닦고, 목전의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꼴 보기 싫은 사람은 만나지 않고, 크게 화를 내지도 크게 흥분하지도 않고, 샤워를 규칙적으로 하면서, 쾌적한 생활을 유지하다가 때가 오면 잠들 듯이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야말로 스트레스를 최소화한 삶. 이러한 삶의 태도를 철학화한 사상가가 고대 중국의 양주(楊朱)다. 양주가 생각하는 인간 본성에는 정치 참여의 욕망같은 것은 없다. 정치 참여? 그거 참 귀찮다. 그거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잘 살 수 있다. 정치 참여란 자칫 부질없는 스트레스만 불러오기 십상이다. 이것이 양주의 생각이다.
 

인간은 정치를 냉소하는 이기적 동물일까
공동체를 떠날 수 없는 정치적인 동물일까
거리의 정치가 불가능해진 감염병의 세상
유효한 정치 참여의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르다.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분명히 말한다. 인간은 정치 공동체를 떠나서 살 수 없다고. 정치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는 신이거나 야수일 거라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치적 참여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효용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양주가 권하는 대로 살다 보면, 인간성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공적인 삶은 도외시한 채 숯불갈비만 혼자 처먹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탈정치적 삶의 태도로 일관하며 숯불갈비만 먹다가 늙어 죽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키스를 할 수 있는 입술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단 한 번도 키스하지 않은 채 늙어 죽는 것과 같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인간은 타고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끝내 온전해지지 않는다. 마음에는 언제나 공터가 남아 정치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비계가 있어야 삼겹살이 완전해지듯, 정치가 있어야 삶이 완전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었던 정치 공동체는 오늘날 국가보다 훨씬 작은 도시 국가여서, 자신이 노예나 여자나 외국인이 아니라면 정치에 직접 참여할 가능성이 오늘날보다 훨씬 높았다. 정치체의 규모와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오늘날,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대의정치를 통해서 실현한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이 대의정치를 제도화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선거를 통해 뽑힌 전문 정치인들이 사람들의 정치적 열망과 필요를 잘 번역해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두꺼비가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돌을 그저 돌아서 지나가듯이”(기 샤를 크로) 하루하루를 나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정치인들은 조만간 공적 가치를 수호하기보다는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이들로 판명된다. 국민의 정치적 열망과 에너지를 제도화한 정치적 실천으로 번역하는 데 실패한다. 그 실패가 거듭될 때, 사람들은 거리로 나온다.
 
프랑스 시인 기 샤를 크로는 두꺼비의 행로를 벗어난 영광스러운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만약 그대가 진정 살기 원한다면/하루하루 새로이 힘을 내어/미친 듯 날뛰는 삶, 거칠게 콧김을 내뿜는 삶/굴복당하지 않으려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 고통스러운 희생과 아드레날린의 삶이 성립하려면, 종종 대상화된 절대악의 존재와 거대한 역사 서사가 필요하다. 그래야 거리에서 집결하여 구호를 다 함께 외치기 쉽다.
 
악의 존재에 맞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고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온 역동적인 정치사가 한국에는 있다. 실로 현대 한국인의 마음에는 대규모 정치적 시위가 준 효능감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각인되어 있다. 1960년 4월 거리의 시위를 통해 독재와 국가폭력을 일삼던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을 하야시킨 승리의 기억, 1987년 6월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직선제를 쟁취한 정치적 승리의 기억, 2017년 현직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낸 정치적 승리의 기억이 있는 것이다.
 
대의정치의 제도적 공간을 벗어난 정치적 에너지는 삶의 제반 영역으로 범람하곤 한다. 생활도, 문화도, 예술도 급속도로 정치화된다. 80년대 한국 사회를 경험한 사람들은 예술을 비롯한 문화의 제반 영역이 정치적 대의에 헌신하려 들었던 때를 기억할 것이다. 혁명과 진보에 복무하는 예술적 전형성을 만들고, 그 전형에 맞추어 저항의 서사를 썼다. 그러한 예술관은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지속된다. 중국의 영화감독 지아장커는 말했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으면 세상을 부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악하므로. 악한 세상에 순응하면 아무 희망이 없다.”
 
사람들이 생업을 중지하고 거리로 ‘거듭’ 나와야만 했다는 것은 승리의 기억인 동시에 실망의 기억이기도 하다. 4·19 의거는 결국 쿠데타를 통한 군사정권의 성립으로 이어졌고,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월 항쟁은 쿠데타 세력의 재집권으로 이어졌으며, 1991년 5월의 시위는 결실 없는 패배로 끝났다.
 
2017년 대통령 탄핵 이후 새로 집권한 오늘의 정부와 여당이 과연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냐를 두고 격론이 현재 진행 중이다. 오늘날 정치적 적폐 세력으로 지목되는 상당수는 소위 보수 세력뿐 아니라 80년대 이래의 민주화 세력이기도 하다. 한때 저항 세력이었던 이들이 정치 권력을 거머쥔 이후, 비판자들은 개혁을 하기 위해 권력을 원했던 것이냐, 아니면 권력을 얻기 위해 개혁을 외친 것이냐고 묻는다.
 
저항 세력이 권력자가 되어 개혁의 예리함을 잃어갈 때는 곧 정치적 냉소가 자라나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으나 약속했던 새 시대가 금방 도래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가 특정 정권의 행태로 환원되지 않을 정도로 뿌리 깊은 것임이 드러난다, 부패한 기득권을 질타하며 집권한 세력 역시 적지 않게 부패했음이 드러난다, 이리하여 정치적 유토피아는 다시 한번 유예된다. 그 유예된 공터에서 예술가들은 도래할 정치적 유토피아에 집착하는 대신 허무와 심연을 보곤 한다.
 
4·19를 경험한 젊은 날의 이어령은 정치적 허무감을 담은 『환각의 다리』를 썼고, 80년대의 거리의 정치를 경험한 비평가 김현은 80년대의 문학을 정리하는 글에 ‘보이는 심연과 보이지 않는 역사전망’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촛불혁명’을 체험한 작가 정지돈은 이제 거시적인 개혁보다는 ‘희망없이 지속하기’를 내세운다. “훌륭하지도 비참하지도 않고 보수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으며 세계에 맞서거나 세계에 종속되지 않은 상태로 (또는 둘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할 일을” 하겠다고 중얼거린다.
 
결국에 도래할 유토피아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로 이런 방식은 실로 대단한 희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살아가다가,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다는 류의 야망. “너무 맥없이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게 나와 내 친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 의식적으로 비영웅적인 자세는 자신의 윤리를 어느 지점에서 확보할 수 있을까?
 
유토피아적 열정을 여전히 간직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예술적 태도를 일러 퇴행적이며, 무기력하고, 냉소적이며, 허무주의적인 현실도피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태도가 정치성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기대는 것은 소위 인류학적 정치성이다. 정지돈이 소환하는 인류학자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단계를 경험하고 미국에서 인류학자로 살아가는 알렉세이 유르착이다. 유르착은 일체의 권력화에 거부하면서 희망없이 지속하는 태도를 ‘내부로부터 탈영토화시키는’ 정치적 전략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거리의 정치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미시적인 탈권력화가 이루어져야 근본적인 변화가 비로소 시작된다.
 
감염병이 창궐하는 시대에 거리에 나와 집결하여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는 일은 더 이상 윤리적이지 않다. 거리의 집회에서 삶의 활력을 찾고, 내가 파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일부가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찰 수 있는 시절은 당분간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거리의 정치가 극도로 위축된 지금 가능한 정치적 참여의 방법을 생각하기 위해 고려 시대 문인 권적(權適)이 쓴 ‘지리산 수정사기(智異山水精寺記)’를 읽는다. 그 옛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고독을 즐기고 식고 마른 심신으로 해탈의 방법이나 찾으며 나만 구제하면 그만이지 남이 무슨 상관이랴, 라고 말하는 것. 그건 자기 개인에게야 좋겠지만 위대한 것은 아니다…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좋은 길을 얻는 것은 위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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