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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31명은 사형수? 수리공·요리사등 평범한 청년이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야간에 고공 침투해 폭탄으로 김일성 거처를 때려 부수자.”

 
1968년 1월 말. 김형욱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이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을 불러 주문한다. 열흘 전쯤 북한의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데 대한 맞불 작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진노하며 보복지시를 내렸고, 당시 최고 권력 기관을 자처한 중앙정보부가 총대를 멘 것이다. 중정은 공군에 북의 김신조 부대를 뛰어넘는 특수부대 창설을 지시했다. 공군을 동원한 건 고공 침투 작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④]민간인 31명 북파부대 창설

 

“사태가 급하니 ‘필요한 서류는 나중에 챙기고 바로 실제 업무를 진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이철희 당시 중정 국제정보국장· 2006년 1월 25일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면담)

  

사형수 중심으로 공작원 모집 착수

중정의 지휘 아래 공군은 1968년 3월부터 사형수 중심의 공작원 선발을 시작했다.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사형수나 무기수를 물색했다. 사형수 등을 찾은 건 훈련이나 북파 작전이 실패해도 비밀에 부쳐 뒤탈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형수 중심의 공작원 선발은 무산됐다. 법무부 반대 때문이다. 법무부는 “사형수의 경우 사형 후 시신을 유가족에게 넘겨줘야 하는데, 작전 중 사망하면 시신 인도 의무를 지킬 수 없다”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공군은 무연고자나 가족과 연락이 끊긴 사람 중심으로 공작원 선발 방향을 틀었다. 이들은 갑자기 사라져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 공군은 전국의 합기도나 태권도 체육관 등을 돌며 신체 건강한 20대 중에서 실미도 공작원 31명을 선발했다.
지난달 23일 경기 고양시 벽제 봉안소의 실미도 부대 단체사진. 우상조 기자

지난달 23일 경기 고양시 벽제 봉안소의 실미도 부대 단체사진. 우상조 기자

  

실미도 부대원 특별대우 보장

공군이 모집한 실미도 부대원은 31명, 북이 남파한 김신조 부대와 같은 규모였다. 공작원의 직업은 행상, 수리공, 서커스단원, 운동선수, 요리사 등 다양했다. 공군은 다양한 보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당초부터 지킬 생각도 없었고 끝내 공염불로 끝났다. 실미도 부대원을 기다린 건 감금과 목숨을 건 극한 훈련이었지만 초기 3개월을 제외하고 월급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김일성 목을 베어올 정신을 갖고 몸을 바치는 일이라고 했어요. 대신 특별 대우를 보장해준다고 했습니다. 임무 기간 중 월 600불 지급, 이틀에 한 번 신탄진 담배 한 갑 지급, 외출과 서신 왕래 자유 등 조건이었습니다.”(김병염 공작원 재판기록)

 

“3개월 훈련받고 이북에 갔다 오면 소위로 임관시켜 원하는 데로 배속시켜주고, 제대를 원하면 제대시켜 원하는 직장 취직을 알선해준다고 했습니다. 훈련 기간에는 장교후보생 대우를 해준다고 했어요.”(이서천 공작원 재판기록)

 

“6개월간 훈련을 받으면 미군 부대에 취직시켜준다고 약속했습니다. 훈련은 밖에서 뛰는 것이고 TV로 교육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한 끼에 400원씩 주·부식으로 식사가 나오는 등 다른 군대에서 볼 수 없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어요.”(김창구 공작원 재판기록)

 
실미도부대 생존자들의 재판 증언이다. 공작원들 사이엔 ‘금고 이상의 전과를 가진 자’가 일부 있었다. 이들은 애초부터 장교로 임용되는 게 불가능했다. 또 미군 부대 취직 역시 미국이 대북 보복 공격을 반대한 상황에서 처음부터 실현되기 어려웠다.
 

탈출이나 사고 나면 자살로 간주

1968년 4월. 공군은 중정의 지시를 받은 지 3개월 만에 실미도 부대 창설을 완료한다. 공군 2325부대 산하의 ‘209파견대’가 공식 명칭이다. 하지만 이후 209파견대보다는 68년 4월 창설일을 빌려 ‘684부대’ 혹은 훈련 장소의 이름을 따 ‘실미도 부대’로 불렸다. 1968년 5월 실미도에서는 장교 1명, 사병 42명, 조종관 5명, 공작원 31명의 입교식이 열렸다.
 

“훈련 도중 도피나 탈출 또는 부주의로 인해서 사고 유발 시 자살 행위로 간주한다.”

31명의 공작원은 입교식에서 선서를 마친 뒤 임시 군번을 부여받았다.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 북한 주석 거처, 원산 원유저장소, 송림제철소를 폭파하는 것이 임부였다. 공작원 31명은 3개 팀(A·B·C)으로 나눠 편제됐다. 또 각 팀은 다시 돌격조·경계조·폭파조 등 3개 조로 구성됐다. 그러나 이들의 신분은 군인도 군무원도 아니었다. 남북이 대치하던 냉전 시기에 자유와 인권이 억압된 ‘실종된 민간인’에 불과했다. 소속도 모호했다. 공군 산하로 창설됐지만, 중정의 통제를 받았다. 실미도 부대장은 정기적으로 공작 훈련과 부대 운영 상황을 중정에 보고하고 지시받았다.
  
실미도 부대의 입교식 직후 공작원을 기다린 건 감금과 지옥 훈련이었다. 공작원뿐 아니라 그들의 훈련을 담당한 기간병에게도 실미도는 지옥으로 변한다. 다음 회에서는 실미도 훈련 장면을 다룬다.
 
※2006년 발표된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심석용·김민중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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