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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는 짖지 않는 개”…인플레파이터→일자리 투사로 변신

“이제 물가는 짖지 않는 개와 같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13년 낸 보고서에서 사라진 인플레이션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계 금융위기 당시 각국 정부는 경기 침체를 막으려 시중에 엄청난 유동성을 공급했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QE) 등을 통해 쏟아진 돈이 물가를 끌어올려야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자취를 감췄다. 이후 저성장·저물가·저금리는 ‘세계 경제의 뉴노멀’이 됐다. 새로운 규칙에 당황한 곳은 각국의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의 나침반이던 ‘필립스 곡선’의 오작동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나침반 역할 ‘필립스 곡선’ 포기
실업률 떨어져도 인플레 없어
Fed, 금리 인상 선제 대응 안해

유럽·일본·한국도 동참 움직임
물가보다 고용 정책 더 중시
‘좀비 기업’ 수명 연장 우려도

필립스 곡선은 실업률과 명목임금 상승률이 역(逆)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경기가 나빠져 실업률이 높아지면 물가는 하락한다. 반대로 경기가 과열되면 실업률은 떨어지고 임금이 오르면서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실업률의 하락은 ‘인플레 파이터’를 자처한 중앙은행에는 금리 인상 신호로 여겨졌다.
  
# 이런 공식이 먹히지 않고 있다. 지난해부터 올해 1분기까지 미국의 실업률은 3% 후반대로 역대 최저 수준에 머물렀지만 물가상승률은 2%를 밑돌았다. 물가가 더는 ‘짖지’ 않으면서, 중앙은행의 북극성이 사라졌다. 중앙은행이 ‘인플레 파이터’에서 ‘고용 파이터’로의 변신한 이유다. 프랑스 경영대학원 인시아드의 푸샨듀트 교수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은행의 우선순위에 변동이 생길 것”이라며 “앞으로 인플레이션보다 실업률 낮추기에 더 무게를 두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일 쇼크’로 세계 경제가 휘청대던 40년 전에는 경제 발전을 위한 물가 안정이 가장 중요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인플레 파이터’란 낡은 옷을 가장 먼저 벗어 던진 곳은 미 연방준비제도(Fed)다. Fed의 두 가지 책무인 물가 안정과 완전 고용(자연 실업률) 중 고용에 방점을 찍었다. 고용을 위해 물가 안정을 당분간 뒤로 미루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물가가 목표치인 2%를 넘더라도 큰 틀에서 목표치에 수렴하면 금리를 인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대처하겠다”고 지난달 27일 밝혔다. 평균물가목표제다.
 
Fed는 물가 상승의 조짐(실업률 하락)이 뚜렷하면 금리를 올리는 식으로 선제적으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물가가 급등하지 않는 한 실업률이 완전 고용 수준을 밑돌아도 급하게 금리를 올리지 않는 인내심을 발휘하겠다는 것이다. 금과옥조로 여겼던 필립스 곡선의 포기이자, 장기 초저금리 시대의 선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중앙은행이 더 이상 실업률 하락을 이유로 경기를 냉각시키려 금리 인상에 나서지 않게 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Fed의 노선 변경은 통화정책 지표로 기능을 상실한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려 섣불리 금리 인상 카드를 꺼냈다가 실업률만 높이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짖지 않는 개’가 된 저물가 기조도 Fed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고용 파이터’로의 변신에 쐐기를 박듯 파월은 “완전 고용이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정책 목표”라고 밝히며 고용이 통화정책의 앞자리에 놓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미국 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소비로 직결되는 소득을 좌우하는 고용에 드라이브를 걸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Fed와 같은 극적인 변신까지는 아니지만 경기 둔화에 맞서는 중앙은행의 무게 중심도 고용 쪽으로 기울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고용을 위한 적극적인 행보에 나설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달 20일 공개된 7월 ECB 통화정책회의 의사록에서 올가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고용이 생산에 뒤처지며 실업률이 급격하게 높아질 가능성이 제기됐다. 지난 2분기 유로존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만 450만 명에 이른다. 시장이 ECB가 QE를 확대하는 등 추가 완화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 일본은행(BOJ)도 ‘고용 파이터’의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촉매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를 이을 차기 총리로 유력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다. 영국 경제분석회사인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최신 보고서에서 이른바 ‘스가노믹스’의 핵심으로 ‘BOJ 정책에 대한 구체적 개입 또는 주문’을 핵심으로 꼽으며 “스가는 BOJ가 일자리 보호에 더 공격적으로 나서길 원한다”고 했다.
 
한국은행도 조심스럽지만 고용 쪽으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2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고용 유지를 위해 한은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경기 회복세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란 시각도 있다. 이 총재가 지난 6월 한은 70주년 기념사에서 “중앙은행은 국민의 재산인 발권력을 신중하게 행사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지만 ‘위기(crisis) 파이터’로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조셉 가그논 피터슨국제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CNBC에 “미국과 달리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에서 (물가와 함께) 고용이 중요한 정책 목표로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IMF 수석 경제학자를 역임한 올리비에 블랑샤르 MIT 교수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물가목표제 대신 임금 인플레이션 목표제를 제안했다. 블량샤르 교수는 “Fed가 임금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하는 게 고용시장 확대와 더 관련이 있고,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고용 파이터’라는 중앙은행의 실험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포브스는 경기 회복세가 더디고 고용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 속에 Fed가 고용 확대를 위해 인플레이션을 감내하며 초저금리를 유지하는 것이 “잘못 디자인된 정책”이라고 각을 세웠다. 포브스는 “초저금리 시대가 도래하며 이자도 갚지 못하는 ‘좀비 기업’의 수명만 연장될 뿐 성장은 더디고 신규 고용은 늘지 않을 것”이라며 “Fed가 조폐공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Fed 평균물가목표제 채택, 초저금리 장기화할 듯
“중앙은행의 역할은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때 펀치볼(punch bowl·칵테일 음료를 담은 큰 그릇)을 치우는 것이다.”  
 
윌리엄 마틴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말이다. 경기가 과열되기 전 금리를 올려 물가 상승 등의 부작용을 미리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앙은행은 금융시장에서 ‘파티의 흥을 깨는 사람(Party Pooper)’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고용 파이터’로 변신하며 평균물가목표제를 채택한 Fed의 선언은 ‘장기 초저금리 시대’의 신호탄과 같다. 평균물가목표제는 물가상승률이 목표치(2%)를 넘더라도 평균적으로 목표치에 수렴하면 금리 인상으로 대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정책금리(0~0.25%)는 제로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목표치를 넘어서는 물가 상승을 어느 정도 용인하겠다는 것은 당분간 금리 인상은 없다는 말의 동의어다. 저금리가 뉴노멀이 된 상황에서 2%대의 물가상승률은 도달하기 쉽지 않은 고지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가 “Fed가 더 오랜 기간 저금리 시대의 토대를 구축했다”고 한 이유다.
 
박성우 DB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Fed가 원하는 인플레이션 오버슈팅(일시적 급등)의 실제 달성은 쉽지 않다”며 “때문에 점도표에 반영된 2022년보다 훨씬 오랜 기간 제로금리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를 기준으로 평균 물가 산출 소급 시점을 과거 3년 전으로 적용해도 내년부터 매달 2.5%의 물가상승률이 3년간 계속돼야 2023년 말에 평균 2%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균물가목표제는 저금리·저물가 상황 속에서 통화정책 카드를 소진한 Fed의 고육지책이기도 하다. 금리 인하와 같은 경기 부양 수단은 동났고, 중앙은행이 움직일 여지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NYT는 “저금리 상황 속 중앙은행들이 차입 비용을 줄이고 고성장을 촉진할 실탄이 줄어들면서 장기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 속에 파월이 정책 쇄신에 나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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