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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의 영화몽상] 시간을 되감아 본들

이후남 문화디렉터

이후남 문화디렉터

‘소주 만 병만 주소.’ 소주 맛을 전혀 몰랐던 초등학생 때부터 이 문장에 익숙했던 건, 그 내용이 아니라 형식 때문이었다.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똑같다. 이런 예로는 ‘기러기’ ‘일요일’ 같은 단어도 있다. 한 줄짜리 문장이나 단어, 즉 1차원만 아니라 2차원 형태도 있다. ‘개똥아/똥쌌니/아니오’는 문장마다 줄을 바꿔 적으면, 가로로 읽어도 세로로 읽어도 똑같은 문답이 된다. 초등학생 눈높이에서 단연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실은 오래전 선조들도 그랬던 모양이다. 이처럼 앞뒤 대칭 구조의 문장이나 글을 두고 회문(回文)이라고 하는데, 역사가 무척 오래다. 동양에서는 한시(漢詩)의 형식이기도 했고, 서양에서도 기원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처음 발견된 2차원 회문은 다섯 글자짜리 라틴어 다섯 단어 ‘SATOR(사토르)’ ‘AREPO(아레포)’ ‘TENET(테넷)’ ‘OPERA(오페라)’ ‘ROTAS(로타스)’로 이뤄져 있는데, 그 중 첫 줄을 따서 ‘사토르 마방진’이라고 불린다.
 
사토르 마방진을 입에 올리게 된 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화제작 ‘테넷’ 때문이다. 이 SF 첩보 영화에서 테넷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당에 맞서는 비밀조직의 이름으로 나온다. 원래의 의미가 무엇이든, 제목의 ‘TENET’이란 영어 철자만 봐도 앞뒤 대칭이 뚜렷하다.
 
‘테넷’은 주인공에게 따로 이름이 없다. 주인공(존 데이비드 워싱턴·왼쪽)과 그 조력자 닐(로버트 패틴슨). [사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테넷’은 주인공에게 따로 이름이 없다. 주인공(존 데이비드 워싱턴·왼쪽)과 그 조력자 닐(로버트 패틴슨). [사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목과 달리 이 영화의 시간여행은 간단하지 않다. 시간여행 전후의 물리적 법칙을 포함해 설정과 전개가 퍽 복잡하다. 한번 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 반복 관람이 필수인 영화, 결말을 알아도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영화란 반응이 나온다. 그런데도 따져보면 놀랍게도 대부분 앞뒤가 들어맞는 묘미가 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영화 전체가 일종의 회문이란 점이다. 문장 몇 줄이 아니라 2시간 30분짜리 영화 전체를 이런 구조로 설계하고 구현한 시도, 첨단 기술이나 새로운 문명을 전시하듯 보여주는 대신 구조로 시간여행의 새로운 서사를 구축한 것이 감탄스럽다. 코로나19로 극장가가 한껏 위축된 와중에도 ‘테넷’은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사실 SF적 설정이라면 요즘의 현실이 더 피부에 와 닿는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QR코드를 찍고, 화상 모니터 앞에서 체온을 쟀다. 영화 관람만 아니라 국수 한 그릇, 커피 한 잔을 먹기 위해서도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1년쯤 전에 누군가 얘기했다면,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다만 회문은 묘미에 앞서 한계도 있다. 가로로든 세로로든 똑같은 문장이 되려면 첫 문장에서 주어진 틀을 마지막 문장이 벗어나긴 어렵다. 이 영화의 시간여행에도 결정론이나 운명론이 어른거린다. 영화에 거듭 등장하는 대사대로 이 세계에선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 카타르시스보다는 약간의 허무감을 부르는 규칙이다.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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