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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진보에게 비핵화를 묻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지난해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북한 경제와 비핵화에 대한 강의를 막 끝낼 무렵이었다. 강의 내내 언짢은 기색을 보였던 한 청중이 일어섰다. ‘북한 핵 개발은 우리 민족을 미제(美帝)로부터 지켜주려는 목적인데 왜 제재로써 이를 막으려 하나’며 따지듯 물었다. 우리 국민 중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혹여 있다면 이들은 기실 ‘종북 진보’다. 북한 주장은 그대로 믿으면서 현재의 미국을 과거 제국주의와 혼동할뿐더러 북한이 종종 한국을 무력으로 겁박한 사실엔 아예 눈을 감고 있다.
 

‘순진 진보’는 북핵에 관심이 없고
‘원조 진보’는 북핵·경협 분리 주장
북한 비핵화 고민하는 참 진보가
국민 공감할 대북정책 제시해야

서울의 한 대학에서 세미나 발표를 마친 후였다. 어떤 교수가 이렇게 질문했다. “북한이 핵을 갖고 있어도 우리가 경제 지원하고 경협도 하면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겠나. 왜 굳이 제재니 압박이니 하면서 평화를 해치려느냐.” 답답한 심정이었지만 다음처럼 답했다. “핵을 가진 상대가 변심할 수도 있고 또 상황이 급박하면 핵을 사용할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안보다.” 북한이 핵을 쓰지 않도록 ‘돈으로 평화를 사자’는 사람들은 ‘순진 진보’다. 자신의 가정에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선 이렇게 한가로이 대처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이들은 가라앉는 경제뿐 아니라 핵 부담까지 후대에 떠넘기려는 무책임한 진보다.
 
비핵화와 경협을 분리해서 접근하자는 원조 진보도 있다. 나아가 미국은 비핵화를, 우리는 경협을 맡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는 탁상공론에 가깝다. 첫째, 미국이 동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부부 사이에도 자녀에 대해 엄하고 인자한 역할을 나누기 어려운데, 이해관계가 훨씬 복잡한 국가 사이에 이런 불평등 합의가 가능할까. 둘째, 경협은 제제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 지금은 비핵화와 경협이 보완적이거나 독립적이 아니라 대체적이다. 경협을 해서 북한에 많은 외화가 들어가고 경제 상황이 개선되면 제재는 유명무실해진다. 비핵화를 위한 거의 유일한 압박 수단이 사라지는 셈이다. 그럼 무엇으로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을까.
 
북한이 우리 정부의 경협 제안을 받을 가능성도 낮다. 최근 김정은은 북한에 일어난 큰 홍수를 외부 도움 없이 자력으로 극복하라고 지시했다. 코로나 방역 때문일 수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타국 지원을 받는 것이 경제난을 ‘자력갱생으로 정면 돌파’ 한다는 그의 노선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자력갱생을 대내외에 과시해야 다가올 북·미 회담에서 협상력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지원을 받으면 내부의 취약함을 인정하는 셈이 돼 협상력이 떨어진다고 그는 믿는다. 즉 자신의 대미 협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의 대규모 지원과 경협이 아니라면 현재로선 남한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원조 진보는 투 트랙 접근이 가능했던 과거와 그렇지 못한 지금을 혼동하고 있다. 핵이 완성되지 못했던 시기에는 더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경협을 통해 우리의 대북 레버리지를 키웠어야 했다. 북한 내 시장화가 촉진돼 밑으로부터의 변화가 위의 결단을 압박하도록 지속적인 관여 정책을 폈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북한 붕괴론을 신봉하는 극단 보수는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 혹자는 대북정책의 실패를 ‘관여했어야 할 과거엔 보수 정부가, 제재해야 할 현재엔 진보 정부가 들어선’ 국운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세계가 요동치고 살길이 절박한데 왜 우리는 박제된 이념만 움켜쥔 채 위기를 키우고 있나.
 
북한 비핵화를 고민해야 참된 진보다. 비핵화 없인 한반도 평화와 번영도 없다고 분명히 밝혀야 책임 진보다. 그런데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비핵화란 단어는 없었고 대신 평화와 번영, 협력만 있었다. 비핵화 없이도 평화와 번영이 올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일까. 재래식 무기로도 북핵과 ‘공포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경협을 통해 김정은을 설득하고 내부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일까. 그러나 10년 내 핵 억지력을 가질 수 있는 재래식 무기가 개발될 것으로 믿기는 어렵다. 북한 경제가 시장체제로 변하고 외국과 연결돼 핵을 사용할 유인이 없는 데까지 이르려면 20년이 필요하다. 북한 비핵화 없인 이 기간이 우리에겐 ‘공포의 계곡’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참된 진보, 책임 진보가 나서야 한다. 비핵화에 대한 포괄적 합의에 기초해 단계적으로 핵을 폐기하자는 제안도 좋다. 비핵화 단계에 맞춰 제재 완화, 평화 체제 구축, 북한 경제 개발이란 세 축을 정교히 하자는 제안엔 합리적 보수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 그리고 국민 다수가 공감하는 방안이라면 미국과의 조율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비핵화는 진보의 어젠다가 아닌가. 북한 비핵화 없이 한반도 평화가 가능한가. 정부가 추진하는 경협이 어떻게 비핵화에 도움이 되는가. 이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변할 수 없는 진보는 정책 결정에서 손을 떼야 한다. 논리도, 근거도 빈약한 가공 소설을 정책으로 만든다면 한반도의 미래는 그렇게 무너져 갈 것이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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