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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불 손자의 '페라리 스캔들'···8년뒤 태국을 뒤집었다

사건은 2012년 9월 3일 일어났다. 태국 수도 방콕 도심에서 고급 승용차 페라리를 탄 운전자가 오토바이를 탄 채 근무 중이던 경찰관을 들이받았다. 차에 매달려 수 미터를 끌려간 경찰은 사망했고, 운전자는 도주했다.
 

창업주 손자, 뺑소니 사망사고 도주 사건
당국, 8년간 부실수사, 가해자는 해외도피
7월 검찰 불기소 발표 후 거센 항의 직면
시위 동력 우려 쁘라윳총리 재조사 지시

페라리의 흔적을 따라 경찰이 도착한 곳은 세계적인 에너지 음료 '레드불'을 소유한 TC제약 일가의 저택. 운전자는 레드불 창업주 찰레오 유위티야의 손자인 오라윳 유위티야(35)였다. 
 
 해외 도피 중이던 2017년 영국 런던에서 포착된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야. [AP=연합뉴스]

해외 도피 중이던 2017년 영국 런던에서 포착된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야. [AP=연합뉴스]

 
이후 8년, 수사는 이상하게 흘러간다. 유위티야는 과속과 뺑소니, 과실치사 등 5개 혐의로 기소됐지만 8번에 걸친 소환 요구에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사고 당시 그가 코카인을 복용했다는 증거가 나왔으나 "치과 치료를 위해 맞은 것"이란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출국금지도 없었다. 유위티야가 해외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국이 손을 놓고 있는 사이 과속, 정차 위반, 피해자 구제 위반 등 대부분의 혐의는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레드불의 지분 51%를 갖고 있는 유위티야 일가는 202억 달러(약 25조원)의 재산을 보유한 태국 내 두 번째 부호다.   
 

#재벌 3세 봐주기,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

유야무야되는 듯했던 사건은 지난달 검찰의 발표로 다시 태국인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공소시효가 남아있던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검찰이 8년 만에 최종 불기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고 당시 유위티야가 시속 177km로 달렸다고 진술했던 경찰관이 최근 당시 차량 속도가 시속 79km가량이었다고 말을 바꾼 게 이유였다.
 
2012년 뺑소니 사고로 망가진 오라윳의 페라리 자동차. [AFP=연합뉴스]

2012년 뺑소니 사고로 망가진 오라윳의 페라리 자동차. [AFP=연합뉴스]

 
경찰 외에도 당시 페라리가 시속 80km 이하로 달리고 있었다고 증언한 새로운 목격자도 나타났다. 그런데 짜루찻 맛통(40)이라는 이 목격자는 지난 5일 의문의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돌연 사망했다. 
 

#우리에게 두발의 자유를 달라 

또 하나의 장면은 태국의 중·고등학교에서 펼쳐진다. 올해 초부터 태국 소셜미디어(SNS)에는 학교의 권위주의적 통제에 분노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남학생에겐 '스포츠머리'를 강요하고, 여학생들은 귓불 위까지만 머리카락을 기를 수 있도록 한 엄격한 두발제한에 중고생들이 항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3일 정부 행사에 참석한 프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3일 정부 행사에 참석한 프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2014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프라윳 짠오차 총리는 2016년 개헌을 통해 정부가 전체 상원의원의 지명권을 갖도록 했다. 정부가 지명한 상원의원의 대다수는 물론 내각의 상당수도 군부 출신으로 채워져, 태국은 현재 사실상의 '군부 통치' 상태다.
 
짠오차 정부는 특히 젊은이들의 정신교육을 강조하며, 학교에서 매일 아침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를 다짐하는 12가지 헌장을 담은 노래를 합창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열린 총선에서 프라윳 총리가 이끄는 친군부 빨랑쁘라차랏당은 제1야당인 친탁신계 푸어타이당에 패했다. 하지만 정부 임명 의원들로 채워진 상원의 힘으로 프라윳 총리는 연임에 성공한다.
 
이에 반발하며 대학생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총리 퇴진, 헌법 개정, 반정부 인사 탄압 중단'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됐다. 여기에 지난달부터 '군대 같은 학교'에 반발하는 중고생들까지 가세한 모양새다.
 

#쁘라윳 총리, "페라리 사건 다시 수사"

올해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집회 금지 명령이 내려진 후 잠시 소강상태였던 시위는 지난달 다시 시작됐다. 지난달 18일 방콕에서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반정부 집회가 열렸고, 최근까지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인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일 태국 방콕 탐마삿대 랑싯 캠퍼스에 모인 시위대가 영화 '헝거게임'에 나오는 '세 손가락 인사' 포즈를 취하며 3대 요구사항을 외치고 있다. [ EPA=연합뉴스]

지난 10일 태국 방콕 탐마삿대 랑싯 캠퍼스에 모인 시위대가 영화 '헝거게임'에 나오는 '세 손가락 인사' 포즈를 취하며 3대 요구사항을 외치고 있다. [ EPA=연합뉴스]

 
이같은 상황에서 수사 당국이 의도적으로 재벌 3세를 비호했다는 '페라리 스캔들'은 시위의 주요 주제로 떠올랐다. 검찰의 불기소 결정이 발표된 후 줄랄롱꼰 국립대 학생들은 '불의가 지배하면 인생은 사라진다'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항의 시위를 벌였다. SNS에는 중고생들을 중심으로 레드불 불매운동을 독려하는 '#BOYCOTTREDBull' 해시태그가 퍼져나가고 있다.
 
태국 정부는 급히 진화에 나섰다. 쁘라윳 총리는 이번 사건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자 4일 총리실 직속으로 진상위원회를 꾸리며 "사건을 원점에서 재수사할 수 있는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진상위는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한 증거가 아직 남아있고, 오라윳의 코카인 복용 정황도 나왔다"며 검찰과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한 상태다.
 
위원회는 검찰과 경찰의 재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오라윳에 대한 불기소 결정이 옳았는지를 결정한다. 이 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높아진 상황으로 볼 때, 불기소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현지 언론들은 내다봤다.
 
지난 3일 방콕에서 해리포터 복장을 하고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는 태국 학생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3일 방콕에서 해리포터 복장을 하고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는 태국 학생들. [로이터=연합뉴스]

 
한편 10일 밤 방콕 외곽 탐마삿대 랑싯 캠퍼스에서는 3천~4천명이 참석한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열렸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많은 중고생이 해리 포터의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들은 집회에서 "태국은 암흑의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며 군부 정권 퇴진을 외쳤다. "이제 민주주의의 마법사들과 머글들이 힘을 합쳐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고 국민의 손으로 권력을 되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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