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새벽 홍콩보안법 위반 혐의로
두 아들과 함께 전격 체포된 지미 라이
의류업체 기업인으로 큰 돈 벌었지만
1989년 천안문사태 후 반중활동 시작
리펑 총리 욕하는 공개 서한도 발표
홍콩 민주화 운동에 자금줄 역할
“중국인임이 자랑스럽고 조국 사랑한다”
“불행한 건 조국을 사악한 공산당이 통치”
![홍콩 민주화 운동의 큰 축인 지오다노 창업주 지미 라이가 10일 새벽 홍콩 자택에서 전격 체포됐다. 혐의는 외국 세력과 결탁해 홍콩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사진은 과거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홍콩의 미래를 걱정하며 눈물을 보인 지미 라이. [로이터=연합뉴스]](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8/11/86e165b9-5bb8-48c2-9dbe-e112a7044810.jpg)
홍콩 민주화 운동의 큰 축인 지오다노 창업주 지미 라이가 10일 새벽 홍콩 자택에서 전격 체포됐다. 혐의는 외국 세력과 결탁해 홍콩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사진은 과거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홍콩의 미래를 걱정하며 눈물을 보인 지미 라이. [로이터=연합뉴스]
지미라이는 중국 공산당이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기 직전인 1948년 12월 8일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서 태어났다. 그가 일곱 살이 됐을 때 아버지는 홍콩으로 떠났고 어머니는 노동개조를 받는 신세였다.
위로 두 누나와 형은 다른 지방으로 떠났고 집엔 그와 쌍둥이 여동생, 그리고 지적 장애가 있는 누나가 어머니와 함께 남았다. 집안의 이런저런 물건을 팔아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처지여서 지미는 일찍부터 돈을 벌어야 했다.
![지난 30여 년간 반중 행보를 걸어온 지미 라이가 10일 새벽 홍콩 자택에서 체포돼 집밖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8/11/6e34a7c9-8053-400f-9bfe-6dc275c84839.jpg)
지난 30여 년간 반중 행보를 걸어온 지미 라이가 10일 새벽 홍콩 자택에서 체포돼 집밖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
기차역에서 짐을 나르고 품삯을 받다 12세 때 홍콩 돈 1달러를 달랑 몸에 지니고 마카오를 거쳐 홍콩으로 밀항했다. 초콜릿이 원인이었다. 한 번은 기차역에서 홍콩 손님의 짐을 날랐는데 그가 돈 대신 초콜릿을 줬다.
본 적도 맛본 적도 없는 걸 입에 넣는 순간 천하에 이런 맛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홍콩사람이고 초콜릿은 홍콩에서 왔으니 홍콩은 반드시 인간 천당(天堂)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중국 언론은 홍콩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지미 라이가 체포되자 마침내 그가 수갑을 차게 됐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8/11/db95cd07-c00c-42e2-87fd-d5442d59b68d.jpg)
중국 언론은 홍콩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지미 라이가 체포되자 마침내 그가 수갑을 차게 됐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
1960년 홍콩으로 밀항한 그는 당시 한 달에 3달러를 받으며 밀입국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16세가 됐을 때는 가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업을 결심했다.
어릴 적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무얼 팔건 ‘라오반(老板, 주인)’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지오다노 창업 후 성공적인 기업인의 삶을 살던 그를 반중 투사로 만든 건 89년 6.4 천안문(天安門) 사태였다.
![홍콩 경찰 약 200여 명이 10일 지미 라이 소유의 빈과일보 사옥에 들이닥쳐 임원을 체포하고 압수 수색을 벌였다. 반중 언론에 대한 ‘재갈 물리기’라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8/11/96d80124-0379-484d-848d-01b8f5e90cd4.jpg)
홍콩 경찰 약 200여 명이 10일 지미 라이 소유의 빈과일보 사옥에 들이닥쳐 임원을 체포하고 압수 수색을 벌였다. 반중 언론에 대한 ‘재갈 물리기’라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앙스신문 캡처]
중국 공산당 정부의 무자비한 민주화 운동 진압에 그는 격분했다. 지오다노의 티셔츠에 “내려오라! 우리는 분노했다!”와 같은 구호를 적어 홍콩 시민에 나눠주고, 이들이 항의 시위를 할 때 입도록 했다. 중국 지도자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이듬해인 90년엔 본격적인 반중 의지 표출을 위해 매체 창간에 나섰다. 넥스트미디어그룹을 세워 ‘일주간(壹週刊)’ 발행에 나섰다. 그리고 여기에 ‘XXX 리펑(李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신화사가 지난해 8월 꼽은 ‘홍콩에 재난을 안기는 4인방’.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지미 라이, 변호사 출신 마틴 리, 입법회 의원 출신의 허쥔런, 홍콩 고위 공무원 출신의 천팡안성. [중국 바이두 캡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8/11/d11d61b2-4caf-4f6d-9e66-087e6050f137.jpg)
중국 신화사가 지난해 8월 꼽은 ‘홍콩에 재난을 안기는 4인방’.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지미 라이, 변호사 출신 마틴 리, 입법회 의원 출신의 허쥔런, 홍콩 고위 공무원 출신의 천팡안성. [중국 바이두 캡처]
천안문 사태 무력 진압에 책임이 있다고 보는 리펑 총리를 향해 욕설을 넣어 공개 비판한 것이다. 그의 중국 내 지오다노 사업이 무사할 리 없었고 그 또한 중국 출입이 막혔다. 그러나 그는 95년 ‘빈과일보(頻果日報)’를 창간하며 중국 비판의 수위를 더 높였다.
중국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된 셈이다. 중국 관영 신화사(新華社)는 1년 전인 지난해 8월 ‘홍콩에 재난을 안기는 4대 인물’이라는 보도에서 지미라이를 첫 번째 인물로 꼽았다.
![중국에선 지미 라이를 ‘민족의 변절자(民族敗類)’라고 비난하고 있다. 중국에 반대하고 홍콩을 어지럽히며 반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바이두 캡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8/11/e487a7ce-6023-4db9-b52f-56fc9141538f.jpg)
중국에선 지미 라이를 ‘민족의 변절자(民族敗類)’라고 비난하고 있다. 중국에 반대하고 홍콩을 어지럽히며 반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바이두 캡처]
매체를 이용해 중국 성토에 앞장서는 한편 홍콩 민주화 세력에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그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홍콩의 민주당과 공민당, 천주교 홍콩교구 등에 꾸준하게 성금을 내 왔다.
2009년의 경우 비회원으로부터 민주당이 모금한 전체 액수의 99%를 그가 부담한 것으로 알려진다. 2014년 홍콩에서 우산 혁명이 벌어졌을 때 그가 지원한 돈이 무려 5000만 홍콩달러(약 76억원)에 달한다고 중국 인민일보는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홍콩의 송환법 반대 시위에 함께 한 지미 라이(가운데)가 두 손을 맞잡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유상철 기자]](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8/11/850a1f30-d8e8-4741-8f79-1674bab6538c.jpg)
지난해 8월 홍콩의 송환법 반대 시위에 함께 한 지미 라이(가운데)가 두 손을 맞잡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유상철 기자]
지미라이는 올해 72세이지만 민주화 운동의 배후에서만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지난해 송환법 반대 시위 현장에서도 늘 선두에 서 있었다. 따라서 홍콩보안법이 지난 6월 30일 통과됐을 때 그를 체포하는 건 사실상 시간문제로 여겨져 왔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그를 그대로 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은 현재 수갑 찬 그의 모습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의 아들 둘과 넥스트미디어그룹 직원들도 함께 체포했다고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1948년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난 지미 라이는 12세 때 홍콩으로 밀항해 의류업체 지오다노로 성공했다. 그러나 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 무력 진압을 계기로 반중 인사로 돌아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중국 공산당 비판에 앞장서 왔다. [중국 바이두 캡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8/11/a298bd09-02a6-4286-a5ba-0855e6952eb6.jpg)
1948년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난 지미 라이는 12세 때 홍콩으로 밀항해 의류업체 지오다노로 성공했다. 그러나 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 무력 진압을 계기로 반중 인사로 돌아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중국 공산당 비판에 앞장서 왔다. [중국 바이두 캡처]
홍콩보안법이 통과됐을 때 지미라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내가 중국인임이 자랑스럽고 내 조국을 사랑한다. 불행한 건 내 조국이 중국공산당이란 사악한 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체포로 그의 반중 행보가 꺾일지는 미지수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