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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김장생의 측실이 된 김종서 7대 손녀의 충절

기자
송의호 사진 송의호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80)

사계고택인 충남 계룡시 두마면 은농재의 모습. [사진 송의호]

사계고택인 충남 계룡시 두마면 은농재의 모습. [사진 송의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충남 논산에 종가와 묘소가 있다. 사계는 『가례집람(家禮輯覽)』이라는 저서를 남겼으며 율곡 이이를 이어 기호학파의 반석을 놓은 인물이다. 퇴계 이황을 이은 영남학파의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에 비길 만한 역할이다.
 
사계는 다시 신독재 김집과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 영향력 있는 제자들을 다수 배출한다. 『사계전서』 문인록에는 아들 김집을 시작으로 제자 284명의 이름이 나온다. 사계는 1613년(광해 5) 66세에 대북파에 의해 계축옥사에 연루된다. 그는 철원부사에서 축출돼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때 그가 머문 곳은 논산 인근 계룡시 두마면에 위치한 사계고택 은농재(隱農齋)다. 연구자들은 사계를 계승한 학자들이 이 시기에 그로부터 예학과 경학을 배운 것으로 보고 있다.
 
사계는 55세 되던 1602년(선조 35) 이 집을 지어 부인 순천 김씨와 함께 만년을 보내고 여기서 삶을 마감했다. 그는 19세에 창녕 조씨와 혼인했으나 39세에 사별하고 3년상이 끝난 41세에 순천 김씨를 다시 부인으로 맞이했다. 둘째 부인의 후손들은 재실 이름을 따 그 할머니를 염선재(念先齋)로 부른다. 그를 두고 숱한 이야기가 전한다.
 
사계는 재혼 당시 슬하에 은과 집, 반 등 세 아들이 있었다. 당시 집은 15세였고 반의 나이는 9세에 불과했다. 돌봐줄 어머니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사계와 혼인할 때 염선재의 나이는 17세.
 
사계고택 영당(影堂)의 내부 모습. 사계가 세상을 떠난 뒤 78일간 시신을 모신 공간으로, 사진은 사계의 초상화와 시호 교지 병풍이다.

사계고택 영당(影堂)의 내부 모습. 사계가 세상을 떠난 뒤 78일간 시신을 모신 공간으로, 사진은 사계의 초상화와 시호 교지 병풍이다.

 
염선재는 당시 성도 이름도 호적도 없이 쫓기며 사는 신세였다. 혼례도 치르지 못했다. 거기서 8남매가 났다. 사계는 자신의 이름 그대로 84세까지 장수한다. 그래서 염선재와 함께 한 기간만 43년에 이른다. 지금은 후손들이 염선재를 사계의 ‘계배(繼配)’로 호칭하지만 당시 신분은 ‘측실(側室)’이었다.
 
측실의 자식은 서자가 돼 과거시험도 볼 수 없다. 문인 장유가 쓴 사계 신도비에는 지금도 염선재가 ‘측실’로 기록돼 있다. 그래서 후손 김기중(74)씨는 “30~40년 전 후손 몇이 신도비의 ‘측실’ 글자를 지우기 위해 정으로 쪼다가 발각된 적도 있다”고 설명한다. 사계 연보에는 ‘부실(副室)’로 표현돼 있다. 사계가 당시 신분이 뚜렷한 양반가 출신의 계배 대신 하필이면 염선재를 선택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염선재는 기실 미천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염선재는 단종 시기 좌의정을 지낸 절재 김종서의 7대 손녀였다. 김종서는 세종의 6진 개척으로 북쪽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지만,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욕으로 단종을 지키려다 반역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때 그의 직계 3대는 거의 몰살하는데 요행히 일점혈육이 살아남아 혈통을 유지한다. 이후 후손들은 신분을 감추고 근근이 살았다. 염선재의 친정이 바로 그들이었다.
 
김장생을 기리는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김장생을 기리는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놀라운 것은 염선재는 조상 김종서의 원통함을 씻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유력한 사계 가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혼인 2년 뒤 아들이 태어나자 염선재는 이 사실을 사계에게 고백했고 사계는 김종서의 명예 회복 당위성에 공감했다.
 
그러나 사계는 생전에 여건이 성숙되지 못해 끝내 조정에 그 뜻을 상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염선재는 사계가 살아 있는 동안 조상의 신원을 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염선재는 그래서 부군 3년상을 마친 뒤 결심한다. 그는 상복을 입고 자손들 앞에서 결연히 자진(自盡)의 뜻을 밝히고 단식을 이어가다 절사(節死)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충신에 그 손녀였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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