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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청산리대첩 김좌진과 함께 기억해야 할 안승구

기자
송의호 사진 송의호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79)

1911년 4월 5일자 미주에서 간행된 신한민보에는 ‘애국당이 도적으로 잡힘’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한일병합 무렵이다. 내용은 이렇다.
 
“안승구 등 10인은 시세의 절박함을 분개하여 한번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기를 들고 반도의 풍운을 움직이려 하다가 도적의 누명을 쓰고 원수의 손에 잡히게 되었다. 그 내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일인 신문에 게재된 바를 참고하여 보건대, 뜻을 정하고 북간도로 건너가 동지를 규합하여 활동을 시작고자 하나 운동비가 없었다. 2월 18일 청석동 신태균 집에 가서 900원을 간청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연루자 18명이 취박(就縛, 잡혀서 묶임)되었으니 심히 불행하다. 이제 그 성명과 신분을 번등(飜騰, 번역하여 베낌) 하건대…(중략)…두령 안승구는 36세(실제는 26세)인데 삼청동 사는 양반이라 하였더라.”
 
신문은 기사 앞부분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다. 안승구(安承龜‧1886~1931) 등이 의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다가 도적의 누명을 썼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앞서 있었던 한 판결문을 읽어 보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피고 가운데는 올해로 100주년인 청산리대첩 승전의 김좌진 장군도 나온다. 판결문의 앞부분을 보자.
 
“피고 김좌진은 명치42년(1909년) 음력 6월 중 서간도 이주를 계획하고 먼저 피고 안승구에게 이를 권유하고 다음에 피고 민병옥 등 기타의 동지를 얻었다.”

 
안승구. [사진 나라얼연구소]

안승구. [사진 나라얼연구소]

 
동오(東吾) 안승구는 1910년 겨울 김좌진의 권유로 군자금을 모아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두령으로 표현된 안승구는 이 사건으로 징역 7년형을 받는다. 당시 동지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다. 안승구가 김좌진보다 나이가 세 살 위다. 안승구는 수감 3년 만인 1914년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기록에도 불구하고 안승구는 여태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했다.
 
영남퇴계학연구원(이사장 이동건)과 나라얼연구소(이사장 조원경)는 7월 11일 경북 경산에서 안승구를 재평가하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날 기조강연을 한 박환 수원대 교수(독립운동사)는 “그동안 김좌진을 연구하면서 그 이름 앞에 나오는 안승구가 누구인지 궁금했었다”며 “1911년 군자금 모금 운동은 김좌진의 권유로 이루어졌지만, 실행은 안승구가 주도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다.
 
사후 90년 만에 이루어진 안승구 재평가 학술대회 모습. [사진 정원일]

사후 90년 만에 이루어진 안승구 재평가 학술대회 모습. [사진 정원일]

 
황해도 연백 출신 안승구는 석방 뒤 유림 활동에 몰두한다. 첫 4년은 순흥 안씨 대동보를 만든다. 1924년에는 조상인 안향 선생 선양 사업에 뛰어든다. 4년 뒤에는 황해도 백천 문회서원 원장이 된다. 그러다가 그는 만년인 1930년 서울 명월관 운영으로 당시 큰돈을 번 안순환을 도와 녹동서원을 건립하는 일에 참여한다.
 
안향의 후손으로 침체된 유교를 부흥시키자며 녹동서원을 세우고 ‘조선유교회’라는 단체도 결성했다. 그 무렵 중국 취푸(曲阜)의 공자 묘가 훼손되는 일이 일어났다. 중국어를 구사하던 안승구는 조선 유림의 위문사절단 대표로 현지에 파견된다. 또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공자를 폄훼한 잡지 ‘신민(新民)’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폐간을 끌어내고, ‘전선각도(全鮮各道)유림단체’ 총대표를 맡는 등 유교 일으키기에 헌신했다.

 
안승구가 1924년 안향 선생 선양사업을 하면서 전국 각지에 복제해 보낸 글씨 ‘堯舜世(요순세, 요순의 태평성대)’. 안향이 직접 쓴 이 글씨는 창덕궁에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이 글씨를 수집한 나라얼연구소 조원경 이사장이 안승구의 손자인 안희찬(왼쪽)씨에게 전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안승구가 1924년 안향 선생 선양사업을 하면서 전국 각지에 복제해 보낸 글씨 ‘堯舜世(요순세, 요순의 태평성대)’. 안향이 직접 쓴 이 글씨는 창덕궁에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이 글씨를 수집한 나라얼연구소 조원경 이사장이 안승구의 손자인 안희찬(왼쪽)씨에게 전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안승구 평가를 둘러싸고 문제가 된 것은 녹동서원과 조선유교회의 친일 논란이다. 그러나 조선유교회에 참여했던 유림 가운데는 독립유공자가 있다. 이날 ‘일제강점기 조선유교회 성격에 대한 재검토’를 발표한 정욱재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당시 사업가는 일제와 협력이나 타협이 불가피했다는 전제가 있다”며 “연구자들이 그동안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유교회의 성격을 규정지어 왔지만 1930년대 들어 녹동서원이 벌인 유교종교화운동은 공개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안승구의 조선유교회 활동은 시기를 세분화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군자금 모금에 이어 적어도 두 번 누명을 쓰는 일은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럴 것이다. 나아가 올해로 100년째를 맞이하는 청산리대첩도 밑거름이 된 안승구 사건을 함께 기억했으면 싶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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