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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은 평화호소인이냐" 조롱받는 '피해호소인' 뿌리는 유시민 딸

"언어의 퇴행이다. 그런 용어가 어디 있냐."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여성의 변호인인 김재련 변호사가 16일 오전 기자들과 만나 한 답변이다. 김 변호사가 지난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언어의 퇴행, 피해호소인'이라고 올린 데 대해 묻자 "그런 용어가 어디 있냐"며 "법을 다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피해자로 돼 있는 거 피해호소 여성으로"라고 답한 것이다. 
 
김 변호사의 답변엔 '피해자'를 '피해 호소자'로 희석하려 한다는 불쾌감이 배어 있다. 법조계에서도 피해호소인 이란 단어는 생경하고 적절치 않다는 반응이다. 네티즌 사이에선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으로 부르는 건 가해자의 책임을 피하려는 뉘앙스가 묻어난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 호소인’이냐”는 비아냥도 나온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 측 변호를 맡은 김재련 변호사는 피해호소인이 언어의 퇴행이라고 지적했다. [김재련 변호사 페이스북]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 측 변호를 맡은 김재련 변호사는 피해호소인이 언어의 퇴행이라고 지적했다. [김재련 변호사 페이스북]

 
하지만 여당과 정치권, 서울시 등은 '피해호소인'이란 단어를 고집하고 있다. “피해호소인께서 겪으시는…"(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해호소인의 고통과 두려움을 헤아려…"(강민석 청와대 대변인), “피해호소 직원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황인식 서울시 대변인) 등이다. 
 

2012년 서울대서 처음 '피해 호소인' 사용

[류한수진씨 페이스북]

[류한수진씨 페이스북]

 
그렇다면 '피해호소인'이란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건 언제일까. 이 단어가 세간의 관심을 끌며 처음 사용된 건 2012년 ‘서울대 대책위 사건’ 때다. 서울대 한 재학생이 2011년 3월 “남자친구가 줄담배를 피우며 이별 통보를 한 것이 성폭력에 해당한다”며 단과대에 신고한 사건이다. 당시 학생회 측은 이를 일반적인 성폭력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고, 이듬해 학칙을 바꿔 ‘피해호소인’ ‘가해지목인’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대, 한국외대, 한양대 등 학생회가 학내 성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호소인’이란 말을 사용해왔다. 
 
2011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대 학생회장을 한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딸인 류한수진씨는 16일 페이스북을 통해 “저는 문제의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는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칙 개정을 주도했고, (학칙에) 피해호소인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 가해지목인이 지켜야 할 의무를 상세하게 규정해 놓았다”고 했다. 류씨는 “시민으로서 이 시점에서는 고발자분을 피해자라고 칭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도 덧붙였다.
 

2016·2018년 피해자연대 단체도 사용

2016년 성폭력 피해자 연대체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피해호소인은 여성학계에서 쓰는 공식적인 용어가 아니다”라면서도 “2016년 '문단내 성폭력 고발' 운동과 2018년 '미투운동' 당시 피해자연대체에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것을 우려해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를 썼다”고 설명했다. 윤김 교수는 “정부 공식기관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박 시장 관련해선 심상정 대표가 첫 사용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빈소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빈소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박 전 시장의 사망 사건 후 피해호소인이란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건 심상정 정의당 대표다. 심 대표는 지난 10일 빈소를 방문해 “가장 고통스러울 수 있는 분은 피해호소인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의당은 지난 13일 김재련 변호사 등 고소인 측의 기자회견 후부터 피해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대표를 지낸 배복주 정의당 여성본부장은 “피해자를 어떻게 부를지 당내에서도 혼란이 있어 기자회견을 기점으로 ‘피해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자는 의견을 냈다”며 “‘피해호소인’에는 혐의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이 내포된 만큼 지금은 피해자로 부르는 게 적절하다”고 말했다.
 
박 전 시장의 고소인측이 13일 기자회견을 열기 직전 한국여기자협회가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12일 한국여기자협회는 해당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의혹을 밝히는 것이 "고인을 애도하는 분위기에 묻혀선 안된다"며 "공소권 없음이란 결정이 내려졌지만, 사회적 정의의 문제로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주당은 성 추문 사건 때마다 호칭 바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0일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0일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민주당은 그동안 피해자와 피해호소인을 혼용해 사용해왔다. 안희정 충남 전 지사와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실이 밝혀졌을 당시엔 ‘피해자’라는 용어를 썼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지난 4월 오 전 시장의 성추행 폭로 후 “피해자분과 부산시민, 국민에게 당 대표로서 깊은 사과의 말씀 드린다”고 했다.
 
2018년 3월 안 전 지사에 대한 미투 폭로가 언론에 보도된 당일 추미애 당시 당 대표는 “피해자와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린다”고 했다. 반면 2018년 우건도 충주시장 예비후보와 지난해 청년 인재로 영입한 원종건씨의 성추문 당시엔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으로 지칭했다.
 

서울시, 과거엔 ‘피해자’만 사용

 황인식 서울시 대변인이 15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황인식 서울시 대변인이 15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시는 과거에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서울시가 2012년, 2014년, 2018년 세 차례 발표한 성희롱 방지 대책 매뉴얼 어디에도 ‘피해호소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지난 4월 비서실 남자 직원이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돼 입건됐을 때도 서울시 측은 ‘가해자’와 ‘피해자’라고 언급했다. 서울시는 2018년 4월 발표한 ‘성희롱·언어폭력 인사 조처 강화방안’을 통해 “사실관계의 확정 전이라도 조사부서에서 인사 조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그 즉시 인사 조처가 이루어진다”며 피해자 우선주의를 내세우기도 했다.
 

법조계, '피해호소인' 호칭은 그 자체로 2차 가해  

법조계와 여성계에선 피해호소인이 적절하지 않은 단어라고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법적인 용어로는 고소인이 맞지만, 피해호소인은 처음 듣는다”며 “교통사고가 나서 횡당보도에 지나가다 치인 사람이 피해호소인이냐. 이 단어는 무책임하고 그 자체로 2차 가해”라고 말했다.
 
김경숙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지금까지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은 ‘성폭력 피해자’로 지칭해왔다”며 “피해자가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일지 단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지아 기자 kim.j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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