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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책거리 그림에 반해, 반평생 연구한 92세 미국인

1975~1977년 창덕궁 낙선재서 전시된 여섯 폭짜리 책거리 병풍. Norman Sibley가 촬영했다. 최근 출간된 책거리 그림 영문 연구서는 케이 E 블랙 여사의 유작이 됐다. [사진 사회평론아카데미]

1975~1977년 창덕궁 낙선재서 전시된 여섯 폭짜리 책거리 병풍. Norman Sibley가 촬영했다. 최근 출간된 책거리 그림 영문 연구서는 케이 E 블랙 여사의 유작이 됐다. [사진 사회평론아카데미]

 1864~1866년에 만들어진 책거리 그림 병풍.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소장품. [사진 사회평론아카데미]

1864~1866년에 만들어진 책거리 그림 병풍.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소장품. [사진 사회평론아카데미]

1973년 콜로라도 덴버에 사는 한 주부가 지역의 미술 애호가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한국 민화를 소개하는 에밀레박물관을 찾았던 그는 책거리 그림이 그려진 병풍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책거리 그림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겠다”며 덴버대 대학원 아시아학과에 등록했다. 나이 마흔다섯, 그때부터 그녀의 늦깎이 ‘책거리 공부’ 인생이 시작됐다.
 

케이 E 블랙, 영문 연구서 출간
70년대에 병풍 그림 보고 빠져들어
‘다수 궁중화가가 그린 작품’ 밝혀내
한국서 온 책 받고 열흘 만에 별세

최근 영어로 쓰인 책가도 그림 연구서 『Ch’aekkori Painting: A Korean Jigsaw Puzzle(책거리 그림: 한국의 퍼즐 맞추기)』(사회평론아카데미)가 출간됐다. 225×300㎝의 큰 판형, 330여 쪽이 넘는 학술서다. 저자는 케이 E 블랙(Kay E Black·92). 47년 전 한국을 찾았던 그다. 지난달 말 한국에서 인쇄된 책을 국제특급배송으로 전달받은 블랙 여사는 그로부터 열흘 만인 지난 5일 샌프란시스코 시니어타운에서 눈을 감았다.
 
책거리 그림: 한국의 퍼즐 맞추기

책거리 그림: 한국의 퍼즐 맞추기

책은 1970년대부터 책거리 그림을 탐구해온 90대 외국인 노학자의 집념이 이룬 결실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는 한국에서 민화로 분류돼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책거리 그림에 천착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작품을 조사하며 책거리의 주요 작품을 직접 촬영하며 연구해왔다. 반평생 노력이 이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책거리 그림은 병풍 형식의 화면에 책과 책장을 중심으로 도자기, 문방구, 향로 등의 기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책가도(冊架圖)라고도 불리며 18세기 정조 때 궁중회화로 유행하다 19세기 이후 민화로 확산했다. 지난 10여년간 국내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대규모의 책거리 전시가 열리며 그 가치가 재평가되기 시작했지만, 1970년대에 책거리 그림은 ‘연구의 불모지’였다.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0년대부터 저자가 한국 책거리 공부에 헌신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면서 “이 책은 한국 회화사 연구에서 매우 의의가 큰 학문적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안 명예교수는 “책가도는 1980년대까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한국에서도 학자들로부터 진지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면서 “저자는 하버드대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 교수와 함께 연구하며 ‘다수의 궁중 화가들이 책거리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들이 지배 엘리트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내 책거리에 대한 낡은 선입견을 깨뜨렸다”고 설명했다.
 
케이 E 블랙 여사. [사진 사회평론]

케이 E 블랙 여사. [사진 사회평론]

안 명예교수에 따르면 블랙 여사는 조선 시대 족보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와그너 교수의 도움을 받아가며 책거리 그림이 그려진 맥락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1990년대부터 ‘책거리 그림’(1993) ‘궁중 스타일 책거리’(1998) 등의 논문을 통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은 하버드대 한국학 창시자인 와그너 교수와 함께한 12년간의 공동작업의 성과”라고 밝히면서 “10년 전 집필을 마치고 출간하려다 여러 문제로 좌절됐었는데, 마침내 한국에서 책을 출간하게 됐다”고 썼다.
 
저자에 따르면, 책거리 그림 연구는 그에게 ‘퍼즐 맞추기’와 같았다. 화폭에 담긴 여러 단서는 그가 풀고 맞춰야 하는 수수께끼이자 퍼즐 조각들이었다. 특히 그는 화가들의 복잡한 계보를 파악하는 데 주력해 화가들의 가족관계 안에서 화풍이 이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각 그림의 공간적 조성 등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작품을 시각적으로 분석해 분류하는 시도도 했다. 그런 결과 책거리 그림을 ①별치 형식 ②트롱프뢰유(평면에 입체가 실재하는 것처럼 착시를 주는) 형식 ③정물화 형식 등으로 분류했다.
 
블랙 여사의 딸 케이트 블랙(미 피드몬트시 도시계획국장·64)은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 책은 어머니 일생일대의 책(It was truly her life’s work)”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책을 받은 뒤 어머니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감격스러워하셨다. 그토록 오랜 세월 책거리 그림을 연구하고 원고를 썼는데도 책 안에 담긴 그림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그는 또 “어머니는 평생 깊은 사랑으로 한국 미술과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했다”며 “어머니의 연구가 한국 미술 발전을 위해 책거리 그림의 남은 퍼즐을 푸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는 제게 훌륭한 롤모델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도 했다. “어머니는 열성적이고, 총명하고, 기억력도 굉장히 좋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정말 사람들을 좋아하고 모험을 즐겼다는 것”이라며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경비행기 조종법도 배우고 1963년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등반을 하셨다. 또 언니들과 내가 대학에 들어간 후 47년 동안 한국 문화 탐험을 하며 책거리 그림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용기와 집념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덧붙였다.
 
강관식 한성대 교수는 “벽안의 노학자의 유작이 된 이 책은 영문으로 쓰여 있어 한국의 책거리 그림을 심도있게 해외에 알릴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며 “국내에서도 이 주제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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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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