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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댓] 강력 부동산 대책 낸 영조, 정작 딸은 집 마구 사들였다

 
“집값을 200냥 올린 것은 참으로 본디 헤아렸던 바가 아니지만…사람으로 하여금 속이 뒤집히게 한다.” (1784년 7월 27일)
“집을 사는 일이 참 어렵다. 모두 이와 같다면 누가 집을 사려고 물어보겠는가?” (1784년 8월 6일)    
 
조선 정조 때 한양에 거주했던 유만주라는 인물이 남긴 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최근 서울의 집값 문제로 여론이 악화하고 있는데, 조선 시대에도 서울의 주택 문제는 나라의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지금처럼 대규모 주택 공급이나 신도시 개발을 하지 않았던 조선은 어떻게 서울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했을까요. 
 

종로구 가회동 31번지 북촌마을 일대에 들어선 고급 빌라와 다세대주택 [중앙포토]

종로구 가회동 31번지 북촌마을 일대에 들어선 고급 빌라와 다세대주택 [중앙포토]

조선도 서울의 주택문제로 골치
한양, 지금의 서울에 수도를 정한 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입니다. 조선은 개경에 살던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서울의 토지를 나눠줬습니다. 
태조 4년, 땅을 나눠준 기준을 보면 정1품은 35부(負)를 받았습니다. 부수를 오늘날 ㎡로 환산하면 4929.05㎡(1493평)쯤 됩니다. 정2품은 30부(1280평), 정3품은 25부(1066평), 이렇게 한품에 5부씩 차등을 두었습니다. 7품 이하부터는 한 품에 2부씩 내렸고 서민은 2부(85평)을 받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넓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건폐율(토지 면적에 대한 건물 면적의 비율)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10% 초반에서 30% 정도였기 때문에 실제 거주공간은 이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처음 서울을 수도로 삼았을 때, 전체 면적은 약 500결(結)이었습니다. 약 10만명 정도가 살기 적합한 크기였죠. 고려까지만 해도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고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서울의 인구는 꾸준히 늘었고, 주택이 부족하니 집값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세종 때부터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고, 성종-연산군 대에 이르면 심각한 문제로 자리 잡게 됩니다.
 
'조선성시도(朝鮮城市圖)'에서 한양도성 [자료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성시도(朝鮮城市圖)'에서 한양도성 [자료 서울역사박물관]

  

100여년 동안 10배 뛴 서울 집값 
지금까지 전해지는 18~19세기 장통방(서울 남대문로와 서린동 일대)의 주택 매매 기록에는 당시 서울 집값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719년 160냥에 거래된 집이 1764년엔 200냥, 1769년엔 300냥, 1783년엔 350냥으로 서서히 오르다가 1800년엔 900냥, 1830년 1205냥, 1831년엔 1500냥으로 급격히 상승합니다. 그러니까 100여년 동안 10배가 뛴 셈입니다. 
 
서울 장통방의 위치

서울 장통방의 위치

당시 매매기록을 보면 주택 거래는 활발한 편이었습니다. 평균 5~6년에 한 번씩 집주인이 바뀌었는데 때로는 3~4개월 만에 바뀌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뒤에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정조 대 유만주라는 사람은 이사를 준비하며 부동산 소개를 받아 6곳의 후보지를 둘러보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을 통해 집값을 높이는 것도 조선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장통방의 주택을 볼까요. 
전만배(田萬培)라는 사람은 1764년 이 집(기와집 19간·빈터 30간)을 200냥 주고 매입했습니다. 전만배는 5년 뒤인 1769년 이 집을 부수고 기와집 16간·빈터 33간으로 새로 지어 김두규(金斗奎)에게 팔았는데 300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집 규모는 기와집 19간에서 16간으로 줄긴 했지만 새집이어서 100냥을 더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1783년엔 김경서(金景瑞)라는 사람이 이 집을 300냥에 산 뒤 1년만에 3간을 더 늘려 350냥에 판 기록도 있습니다. 
 
아래 표는 18~19세기 서울의 주택가격과 쌀값의 변화 추이를 나타냅니다. 18세기만 해도 쌀값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는 반면, 집값의 상승폭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19세기 서울 종로 장통방의 한 주택 가격 변화 추이. 양진석 『조선후기 漢城府 中部 長通坊 丁萬石契 소재 가옥의 매매와 그 특징』에서 인용 [가격단위: 냥(兩)]

18~19세기 서울 종로 장통방의 한 주택 가격 변화 추이. 양진석 『조선후기 漢城府 中部 長通坊 丁萬石契 소재 가옥의 매매와 그 특징』에서 인용 [가격단위: 냥(兩)]

 
 18~19세기 벼 1주 가격 변화 추이.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에서 인용 [가격단위: 전(錢) 10전-1냥(兩)]

18~19세기 벼 1주 가격 변화 추이.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에서 인용 [가격단위: 전(錢) 10전-1냥(兩)]

비슷한 기록이 정선방(종로구 낙원동, 익선동 일대)의 가옥 매매 기록에도 나옵니다. 18간짜리 기와집을 750냥을 주고 사서 21간짜리로 확장한 뒤 1년 만에 1000냥을 주고 판 기록이 있는데, 이 경우는 재건축을 해서 집값을 30%가량 높여 되판 셈이죠. 

 
노른자 땅은 프리미엄을 붙이는 관행이 조선 초부터 있었습니다. 세조 때는 원각사를 짓기 위해 시전, 그러니까 조선시대 상가가 밀집해있던 종로 일대 민가를 철거했는데, 이때는 시세의 3배를 더 얹어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당시 재상 신숙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자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이권을 노리는 땅이니, 3배로 주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작품 중 '기와이기'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단원 김홍도의 작품 중 '기와이기'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금수저' 자녀도 한숨 쉰 서울집 구매
이런 형편이니 서울에서 좋은 집을 구매한다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인기 거주지엔 대출이나 집안 찬스를 쓰지 않고서는 자기 집을 소유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앞서 소개한 유만주(1755~1788)는 과거에는 번번이 낙방한 사대부 집안의 자제였는데 변변한 직업이 없는 상황에서도 1000냥에서 2000냥가량 되는 주택을 몇 차례 사들였습니다. 유만주가 집을 산 1780년대 장통방과 정선방 일대 기와 14간 주택이 300냥 정도에 거래됐으니, 고가의 주택이었던 셈입니다.  
 
유만주가 남긴 일기 '흠영' [자료 서울역사박물관]

유만주가 남긴 일기 '흠영' [자료 서울역사박물관]

고시 낙방생인 그가 서울에서 비싼 집을 사들일 수 있었던 것은 고위 공무원인 아버지와 넉넉한 친척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나 친척에게 수백냥을 빌리고 사채업자에게 1000냥 정도 대출을 받아 주택을 매입하곤 했는데, 돈을 빌릴 때는 사채업자에게 편지를 보내 매매하는 집 주소를 상세히 알려주고 도면도 그려 주택의 가치를 알렸던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상 오늘날 은행의 주택담보대출방식과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주택 알선 및 거래는 ‘집주름’이라고 해서 지금의 부동산 중개업자와 같은 전문 인력이 매매를 중개했습니다. '금수저'에 백면서생인 그는 집주름의 농간에 휘둘리곤 했던 것 같습니다. 1784년 4월 18일 일기엔 1200냥이었던 집 가격을 당일 1300냥을 요구받아 난감해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고위공직자의 다주택 욕심 
“그리고 듣건대 ‘소격서(昭格署) 앞에 정효상의 집이 두 채나 있으며, 재상(宰相)들이 서로 다투어 두 채씩 짓기 때문에 소민(小民)들이 성중(城中)에 거접(居接) 할 수 없다’ 하니, 그 폐단이 작지 않다.”(『성종실록』 12년 1월 27일)  
 

서울의 주택시장을 교란한 것은 공직자들도 한몫했습니다. 이미 성종 때는 고위공직자의 2주택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관직자가 일반인의 집을 사들이는 것을 막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자 도성 안 집 매매와 전세를 모두 금지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를 어기면 관리는 벼슬길을 2년 동안 막고, 유생들은 6년간 과거시험 응시자격도 박탈했습니다. 또 여염집을 사들인 공직자들에겐 1년 안에 모두 집을 내놓도록 했습니다. 
 
15세기 조선 성종 때 세운 필경재는 서울에서 500년이 넘는 유일한 가옥이다. [중앙포토]

15세기 조선 성종 때 세운 필경재는 서울에서 500년이 넘는 유일한 가옥이다. [중앙포토]

“어영대장 홍봉한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번에 (주택을) 팔고 사는 것을 모두 금지하신 하교는 성의(聖意)를 우러러 알 수 있습니다마는, 이보다 앞서 매입한 것을 하루 이틀 안에 모두 도로 물리게 하면 매우 소요스러울 것이며… 사대부도 전하의 백성이니, 마땅히 진념(軫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간(摘奸·부정한 일에 대한 조사)에 들지 않은 자는 탕척(蕩滌·사면)하고 그 나머지는 올해 안으로 도로 물리게 하라” (『영조실록』 30년 7월 16일)
 
당시 이 법안은 큰 혼란을 가져왔는데 왕의 외척인 홍봉한의 발언에서도 당혹과 우려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이 법안은 집이 없거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사해야 하는 사람들도 곤란해지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난감했던 것은 왕의 측근들조차 지키지 않다가 적발됐던 것이죠. 
 
 단원(檀園) 김홍도(1745~?)가 1801년에 그린 8폭 병풍 그림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사진은 삼공불환도 중 가옥 풍경 부분. [연합뉴스]

단원(檀園) 김홍도(1745~?)가 1801년에 그린 8폭 병풍 그림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사진은 삼공불환도 중 가옥 풍경 부분. [연합뉴스]

“좌의정 김상로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과 중신(重臣) 원경하가 장통교(長通橋) 남쪽에 여염집을 사서 이웃이 되어 차례로 들어가 산 것은 모두 10여 년 전의 일인데, 신이 개천(청개천) 북쪽으로 옮겨 산 지는 겨우 3년이 되었고 중신은 아직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중신은 그대로 살다가 죄를 받았고, 신은 옮겨 살았기 때문에 요행히 면하였습니다. 청컨대 신이 일찍이 법금(法禁)을 범한 죄를 살펴 바루소서.” (『영조실록』 30년 7월 1일)
 
원경하는 부제학 등을 역임한 영조의 측근이었습니다. 원경하와 좌의정 김상로는 법을 어기고 장통교 인근 일반인의 집을 사들여 살았는데, 원경하만 적발되고 좌의정 김상로는 3년 전 이사한 덕분에 적발을 면했습니다. 김상로는 자신도 걸리는 게 시간문제라고 여겨 불가피하게 자수한 것입니다. 
 
국왕은 서울 집값에 책임이 없었을까 
그렇다면 국왕은 서울 집값 문제에 떳떳했을까요. 왕의 자녀들이 주택 가격에 혼란을 주기도 했습니다. 왕자나 공주들이 결혼을 한 뒤 궁에서 독립해 나가면 집을 지어줬는데 풍수상 좋은 땅에 큰 집을 지으려다 보니 서민들의 가옥 몇십 채를 철거하고 집을 지었기 때문이지요. 세종 때는 영응대군의 집을 짓기 위해 안국동 일대 가옥 60채가 철거됐고, 문종 때는 경혜공주의 집을 짓기 위해 가옥 40채가 철거됐습니다. 

  
서울 북촌 일대. 안국동은 조선시대에도 사대부들에게 인기가 많은 주거 지역이었다. [서울시 한옥문화과 제공 ]

서울 북촌 일대. 안국동은 조선시대에도 사대부들에게 인기가 많은 주거 지역이었다. [서울시 한옥문화과 제공 ]

이때 조정은 잡음을 막기 위해 시세보다 비싸게 이 집들을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서울의 주택 가격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됐기도 했습니다. 종친이 구입할 것이라는 '기대심리' 때문에 안국동 등 주요 지역은 집값이 뛰는 것이죠. 그래서 이미 가옥이 밀집한 지역 대신 빈 땅에 지어야 한다는 지적이 몇 차례 나왔는데요. 이때마다 국왕은 “마땅한 빈 땅을 구하는 것은 어려우니 집값을 넉넉히 주어 사들이라”고 일축하곤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신도시 같은 미개발지에 집을 마련하자는 신료들의 주장에 국왕은 ‘내 자식은 강남 노른자 지역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맞받아친 셈이지요. 주택 매매 통제라는 강력한 규제까지 들고나온 영조의 자녀들도 집값 흔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조 10년, 부제학 이종성의 상소 중 일부입니다. 
“옹주(翁主)가 사여(賜與)받은 저택 옆에는 여염집을 많이 사서 장차 개척(開拓)하여 집을 지으려 한다고 합니다. 모르긴 하지만 전하께서 과연 이런 일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영조실록』 10년 8월 15일)
 
영화 '사도'에서 영조(오른쪽)와 사도세자 [중앙포토]

영화 '사도'에서 영조(오른쪽)와 사도세자 [중앙포토]

영조의 딸이 결혼하면서 독립해 나가며 주택을 받았는데, 그것이 부족했는지 집을 증축하기 위해 주변에 있는 일반인들의 가옥을 대량 매입하고 있다는 것을 고발한 것입니다. 엄연한 불법이었죠. 이렇듯 영조의 강력한 주택 규제안은 자녀와 측근들에 의해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주택가격은 계속 올랐고, 집값을 올리는 다양한 방법이 이어졌습니다. 전만배가 리모델링을 통해 집값을 50%나 높여 되판 것은 영조의 주택 매매금지 법안이 나오고 15년 뒤인 영조 45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주택 문제는 복마전인 것 같습니다. 조선 이래 지금까지 서울 집값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고 해법은 지금까지도 엇갈리고 있습니다. 일부에선 서울 도심이나 역세권에 고밀도 개발을 통해 공급을 늘려야 집값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한편에선 이런 개발이 서울 집값을 더 올린다며 강한 규제와 신도시 분산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입장이 팽팽하다 보니 정권마다 해법도 달라집니다. 다만 어떤 방법을 쓰든 그것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공직자와 권력자의 주변부터 살펴야 한다는 것이 조선 시대 역사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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