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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 “지구전과 회담 통해 전쟁 끝내려 38선 견지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4〉

정전회담 중국 측 대표 덩화(왼쪽 첫째)와 지에팡(오른쪽 첫째). 앉은 사람은 회담을 막후에서 지휘한 리커농(李克農). 뒷줄 중앙은 리커농의 고문 차오관화(喬冠華). [사진 김명호]

정전회담 중국 측 대표 덩화(왼쪽 첫째)와 지에팡(오른쪽 첫째). 앉은 사람은 회담을 막후에서 지휘한 리커농(李克農). 뒷줄 중앙은 리커농의 고문 차오관화(喬冠華). [사진 김명호]

1951년 5월 17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한국전쟁 정전담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국가안전위원회(NSC)의 건의를 비준했다. “미국의 적은 소련이다. 참전도 안 한 소련이 뒤에서 조종하는 전쟁에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과 연합군은 중국지원군 참전 8개월 후인 51년 6월 중순, 38선 부근까지 퇴각했다. 전선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군사력도 겉보기엔 비슷해졌다.  
  

지상군 병력은 북·중 연합군 우세
해·공군 화력은 한·미 연합군 막강

중국은 전투와 대화 병행 전략 써
인력 있지만 돈 없어 장기전 불가

억지로 정전회담 대표 맡은 덩화
참전 많이 했으나 외교 경험 없어

미국 등 유엔군 참전국들 증병에 난색
 
한·미 연합군은 70만으로 증가하고, 중국지원군과 북한군도 112만 정도로 늘어났다. 한·미 연합군은 병력만 열세였다. 전력은 북·중 연합군이 어림도 없었다. 전투기와 폭격기, 수송기 등 항공기 1670대와 270척의 함정, 1130량의 탱크와 3000여 문의 대포로 하늘과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보병의 화력과 기동력도 엄청났다.
 
미군도 약점은 있었다. 미 육군은 18개 정규 사단의 3분의 1 이상인 7개 반 정도의 사단 병력을 6·25전쟁에 투입했다. 당시 미군의 전략 중점은 유럽이었다. 한반도에 증병은 곤란했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나머지 국가들도 증병은 바라지 않았다. 보병이 우세한 북·중 연합군을 참전 초기처럼 밀어붙이기엔 역부족이었다.
 
냉전 시절 텐안먼 광장에서는 미국 비난 퍼포먼스가 그치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냉전 시절 텐안먼 광장에서는 미국 비난 퍼포먼스가 그치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성명을 발표하고 먀샬과 브래들리가 사방으로 유세와 외교 활동을 폈다. 소련통 조지 케넌은 주소대사 시절 막역했던 유엔대표 마리크와 접촉했다. 소련을 토닥거리고 베이징 주재 중립국 외교사절들 통해 정전 의사를 중국에 흘렸다.
 
중국의 전략은 지구전과 대화의 병행이었다. 총참모장 대리 네룽쩐(聶榮臻·섭영진)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항미원조 시절의 덩화(왼쪽 둘째)와 간스치(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항미원조 시절의 덩화(왼쪽 둘째)와 간스치(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5차 공세가 끝난 5월 하순, 중앙군사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다. 동지들은 38선 부근에서 전쟁을 끝내자고 주장했다. 담판으로 해결하자는 의미였다. 나도 미군과 남한군이 조선 북부에서 물러났으니 정치적 목적은 달성했다고 판단했다. 마오 주석이 벤따벤탄(邊打邊談), 싸우면서 대화한다는 방침을 정하자 다들 찬성했다. 6월 3일, 김일성 주석이 베이징에 왔다. 마오 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총리와 미국이 제의한 정전담판 문제를 의논했다. 마오 주석과 김일성은 의견이 일치했다.”
 
회담장으로 향하는 지에팡(왼쪽). [사진 김명호]

회담장으로 향하는 지에팡(왼쪽). [사진 김명호]

중앙군사위원회와 마오쩌둥의 지시를 접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7월 1일, 전략가다운 답전을 보냈다. “8개월간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전쟁이 길어지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미국은 동방과 세계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실패를 감수할 리가 없다. 지구전에 돌입하면 병력이 분산되고 역량이 약해지는 것은 미군도 어쩔 수 없다. 인원과 물자의 소모가 막대하고 운수에도 어려움이 많겠지만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우월하다. 우리는 인원이 많고 보병이 강하지만 운수에 어려움이 많다. 조선은 땅덩어리가 작고 지형이 오밀조밀해서 작전에 어려움이 많다. 공군도 보급에 도움이 못 되고, 작전을 펴기 전에 제대로 작용을 못 한다. 장기전에 돌입하려면 평균 2개월에 한 번은 반격을 시도해서 적의 공격을 격퇴해야 한다. 매월 보충병 3만 명과 매년 미화 7억 달러 내지 8억 달러(1950년 기준)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장기전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재력이다. 인력은 충분하다. 나는 중앙의 결정에 복종한다. 지구전과 회담을 통해 전쟁을 끝내기 위해 38선을 견지하겠다.”
  
덩화, 부대표에 지에팡 임명되자 안심
 
정전회담이 진행되던 기간 중국 위문단원이 촬영한 평양 거리의 이정표. 지명을 한자로 쓰고 서울도 한성(漢城)이라 표기했다. [사진 김명호]

정전회담이 진행되던 기간 중국 위문단원이 촬영한 평양 거리의 이정표. 지명을 한자로 쓰고 서울도 한성(漢城)이라 표기했다. [사진 김명호]

펑더화이는 부사령관 천껑(陳賡·진갱)과 덩화(鄧華·등화), 부정치위원 간스치(甘泗淇·감사기), 참모장 지에팡(解方·해방) 등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문 보여주며 정전회담 대표로 덩화를 지목했다. 덩화는 “내 전문은 전쟁이다. 외교에 능한 사람으로 바꿔 달라” 며 손사래를 쳤다. 천껑과 간스치가 발언을 요청했다.  
 
“덩화 동지는 외교 무대에 나서 본 적이 없다. 물건값 흥정도 제대로 못 한다. 전쟁 경험 하나만은 누구보다 풍부하다. 정전회담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담판이다. 지원군 부사령관으로 5번에 걸친 전투에 빠진 적이 없다. 회담에서 가장 발언권이 있는 사람이다.”
 
펑더화이가 지에팡을 부대표로 임명하자 덩화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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