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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억 들인 428㎞ 경제대동맥, 수도권·수학여행 탄생시켰다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가 7일로 개통 반세기를 맞는다. [중앙포토]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가 7일로 개통 반세기를 맞는다. [중앙포토]

 경부고속도로가 7일 개통 50년을 맞는다. 반세기 동안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 발전의 대동맥이자 견인차 역할을 했다. 경부고속도로 50년을 맞아 길의 과거를 되새기고 미래를 탐색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지난달 15일 오후에 찾은 옥천터널. 충북 옥천군 동이면과 청성면 사이를 잇는 산지를 뚫은 길로 옛 이름은 ‘당재터널’이다. 평일 낮이었지만 터널을 지나는 차량은 몇 대 되지 않고 한산했다.  

경부 50년,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다
① 산업화ㆍ현대화의 견인차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은 하행선만 군도로 사용 중이다. [강갑생 기자]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은 하행선만 군도로 사용 중이다. [강갑생 기자]

 
 서울 방향 터널이 길이 585m, 부산 방향은 550m로 지금은 하행선 터널만 군도(郡道)로 사용 중이다. 상행선 터널에는 샐러드용 채소를 재배하는 스마트팜이 들어섰다.  
 
 오랜 기간 경부고속도로의 한 축이었지만 2003년 선형 개량의 여파로 고속도로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당재터널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고유 명사'다. 최대 난공사 구간이자 최후의 준공 장소였다. 
 

 11명 순직한 최대 난공사 당재터널 

 1969년 9월 11일 현대건설이 맡아 착공한 당재터널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1980년 한국도로공사가 발간한「고속도로 건설 비화 ‘땀과 눈물의 대서사시’」에 따르면 당재터널 구간은 접근로가 없는 험지여서 장비와 인력투입부터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당재터널 공사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잦은 사고로 11명이 순직했다. [사진 한국도로공사]

당재터널 공사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잦은 사고로 11명이 순직했다. [사진 한국도로공사]

 
 게다가 퇴적층 지대인 탓에 굴착한 터널 안에서 암석이 떨어지는 낙반 사고가 13차례나 발생했고, 모두 11명이 순직했다.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428㎞)에서 나온 희생자(77명)의 14%가 이 짧은 구간에서 숨진 것이다. 약 290일간 연중무휴로 작업했지만, 하루에 채 4m도 뚫지 못했다. 
 
 건설비도 다른 구간(㎞당 1억원)보다 5배나 많은 5억원이 투입됐다. 혈전 끝에 1970년 6월 27일 밤 양쪽에서 뚫어온 터널이 마침내 이어졌고, 다음날 모든 구간 중에서 마지막으로 준공을 했다. 덕분에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식이 열릴 수 있었다.  
  

 429억 건설비와 야당 반대 장벽  

1970년 7월 7일 열린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식. [사진 한국도로공사]

1970년 7월 7일 열린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식. [사진 한국도로공사]

 수많은 역경을 딛고 건설된 경부고속도로가 개통 50년을 맞았다. 우리나라 산업기반시설의 출발점으로, 국가 발전의 기능적ㆍ상징적 핵심기반시설로 평가받는 경부고속도로이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다. 
 
 당시 정부 예산의 20%가 넘는 막대한 건설비(429억원)도 문제였지만 정치권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도 경부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물류혁명을 이끌며 국내 산업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앞서 1968년 말 경인고속도로가 개통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고속도로는 경부가 그 시작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김시곤 대한교통학회장(서울과학기술대 교수)은 “지금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박정희 정부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고 건설한 경부고속도로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휴게소, 버스 수학여행 등 새경험   

 고속도로 건설이 가져온 경제적 효과는 수치로도 입증된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1970년 279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GDP는 3만 달러를 넘어섰고, 화물수송실적은 6000만톤에서 31배 가까운 18억5000만톤(2017년 기준)으로 급증했다. 
국내 최초의 고속도로 휴게소인 추풍령 휴게소의 초기 모습. [사진 한국도로공사]

국내 최초의 고속도로 휴게소인 추풍령 휴게소의 초기 모습. [사진 한국도로공사]

 
 경부고속도로는 우리 사회의 질적 성장에도 기여했다. 「경부고속도로의 사회문화사적 의미와 시사점 연구」(2020년, 한국도로공사 도로교통연구원)에서는 “시공간의 축소와 도시화, 산업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현대적 성장을 유인하는 촉매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경부 축을 중심으로 수도권과 대구, 울산~부산의 거대도시권을 형성했고,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시속 100㎞의 ‘자동차 전용도로’는 물론 고속버스터미널, 톨게이트 등 새로운 공간 경험을 줬다는 의미다. 
초창기 서울톨게이트의 모습. [사진 한국도로공사]

초창기 서울톨게이트의 모습. [사진 한국도로공사]

 

  "향후 대륙 연계 교통망 준비해야"  

 한국도로공사 도로교통연구원의 이승배 박사는 “고속도로를 이용한 관광과 수학여행, 기업의 명절 귀성 단체 버스 운영 등 경부고속도로는 새롭고 다양한 문화를 창출했다"고 소개했다.    
 
 또 도로변 임시 정류장에 잠시 내려 노상 방뇨를 하던 시절에 화장실과 식당ㆍ주유소를 갖춘 고속도로 휴게소가 등장했다. 1971년 문을 연 추풍령휴게소가 국내 최초다. 승용차 여행객이 늘면서 ‘고속도로 편 전국관광도’(1973년)까지 발간됐다. 
경부고속도로는 유럽까지 이어지는 아시안하이웨이 1번이다. [연합뉴스]

경부고속도로는 유럽까지 이어지는 아시안하이웨이 1번이다. [연합뉴스]

 
 경부고속도로는 이제 새로운 50년을 바라보고 있다. 이승배 박사는 “자율주행과 AI로 대표되는 기술 발전을 적극 포용하면서, '아시안 하이웨이 1번'으로서 새로운 대륙 연계 교통망이 될 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경부고속도로 어떻게 건설했나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서울~수원 간을 시작으로 총 7개 구간으로 나눠 공사가 진행됐다. 당재터널 공사를 마지막으로 착공 2년 5개월만인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개통됐다. 
 
 발주처는 당시 건설부(현 국토교통부)였고, 시공은 현대건설 등 16개 건설업체와 3개의 군 공병단이 담당했다. 연인원 892만명과 165만대의 장비가 투입됐고, 공기 단축을 위해 겨울에 도로 위에 불을 질러 땅을 녹이는 비상수단까지 동원됐다. 
불리한 지질과 잦은 사고로 어려움을 겪었던 당재터널 공사현장. [사진 한국도로공사]

불리한 지질과 잦은 사고로 어려움을 겪었던 당재터널 공사현장. [사진 한국도로공사]

 
 당시 국내에서 보유한 중장비(1600여대)는 6.25 전쟁 전후에 도입된 낡은 것들이어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의 중장비 업체에서 외상으로 들여왔다고 전해진다. 429억원의 건설비는 휘발유세 2배 인상과 도로 국채 발행, 대일 청구권 자금, 통행료 수입 등으로 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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