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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기업들 경제·화폐 통합에 휘청…산업 생산 70%감소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10〉

통일 직후인 90년 11월 28일 금속산업노조가 일자리 사수를 위해 신탁관리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통일 직후인 90년 11월 28일 금속산업노조가 일자리 사수를 위해 신탁관리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1990년 7월 1일 동서독 화폐통합 발효에 따라 동독 주민들이 서독마르크화를 손에 쥐게 되자 많은 사람에게는 꿈이 현실이 됐다.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서독 자동차의 구매나 낯선 곳으로의 여행 또는 돈이 많이 드는 여행 등이 가능해졌다.
 

동독 제품, 서독제보다 품질 뒤져
산업 붕괴로 대량 실업 사태 경험

소련 주도 코메콘연합 속한 동독
울타리 해체되자 수출 시장 붕괴

통일 후 10년 간 5분의 1 실업도
작년 실업률 동독 6.4%, 서독 4.7%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곧 동독 지역에 ‘꽃피는 경관(bluhende Lands-chaften)’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콜 총리의 발언은 장기적으로 볼 때는 맞았다. 실제로 동독 지역에서는 유례가 없는 사회기반시설과 주택 및 기업들의 복구작업이 진행됐다.
 
하지만 경제화폐통합은 동독 기업들로서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경제화폐통합이 시행되고 난 직후인 90년 7월부터 8월 사이 불과 두 달 동안 동독 지역에서의 산업 생산은 70%나 감소했다. 실업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던 동독 사회에서 갑자기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하게 됐다. 구동독에서는 모든 사업장이 계획 달성을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근로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라데베르거맥주 등 몇 안 되는 제품만 생존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1990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동독 지역에는 ‘꽃피는 경관’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1990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동독 지역에는 ‘꽃피는 경관’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동독 경제의 심각한 위축에는 수요와 공급 측면의 여러 이유가 존재했다. 소비재 부문에서는 무엇보다 동독 주민들이 동독 제품들을 구매하려는 의사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서독 제품들보다 동독제의 품질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전 동독에서는 서독의 세제나 위생용품 또는 식품들을 소위 인터숍(Intershop)에서 경화(硬貨)인 서독마르크화를 지불하는 경우에만 구매할 수 있었다. 경제화폐통합과 함께 이제는 모든 동독 주민들이 서독 제품을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에 동독 제품들은 더는 팔리지 않게 됐다.
 
그 후 5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서 예전 동독 상품들에 대한 향수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미 그때는 예전의 그 물건들이 거의 모두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로트캡헨 샴페인이나 라데베르거 필스너 맥주와 같이 몇 개 되지 않는 동독의 옛 제품들만 통일 이후 시장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베를린이나 다른 몇몇 동독 도시들에 옛 동독 상표 제품들을 판매하는 오스트숍(Ostshop)이 있다.
 
동독 50마르크 지폐에 그려진 국영기업 슈베트 석유화학 콤비 나트.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동독 50마르크 지폐에 그려진 국영기업 슈베트 석유화학 콤비 나트.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공산품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90년까지 동독은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코메콘연합에 속해 있었다. 90년 1월 코메콘 소속 회원국들이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개최됐던 45차 회의에 참석했을 때 상황은 이미 크게 달라져 있었다. 중동부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적인 전환과정이 전개된 이후 개별 국가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경제활동을 수행하고자 했으며 막강한 소련의 영향력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같은 해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코메콘은 스스로 해체했다. 동독 산업계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수출 시장이 붕괴된 셈이다.
 
서독이나 서방 국가들로의 수출은 훨씬 어려웠다. 동독 지역은 통일되는 시점부터 법적으로 서독과 동일한 조건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구동독 지역의 기업들은 커다란 유럽공동체(EC)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지만 제품의 품질이 경쟁해야 하는 다른 업체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낮았다.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기계와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게다가 동독 기업들이 지니고 있던 가격 경쟁력도 경제화폐통합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발휘할 수 없었는데, 이는 서독마르크화를 기준으로 사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독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신연방주들의 수출 비중이 서독 지역 기업들보다 전체적으로 낮다.
 
‘중부 독일 화학 삼각 지대(부나-로이나-비터펠트)’에 있는 슈코파우의 부나 화학공장.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중부 독일 화학 삼각 지대(부나-로이나-비터펠트)’에 있는 슈코파우의 부나 화학공장.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동독 기업들은 공급 측면에서도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동독 시절에는 공식적으로는 실업이란 게 없었지만 기업에는 너무 많은 과잉 인력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동독 철도청에는 비슷한 기술 분야에서 서독 연방 철도의 약 7배에 달하는 인력이 종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들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처음부터 동독 지역에서의 빠른 임금 인상을 위해 투쟁했다.
 
이에 반해 사용자들을 대표하는 단체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업은 신탁관리청의 관리하에 있었으며 현장에서 관리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주의 시절의 관리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민영화 과정에서 자신들은 해고될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임금을 낮게 유지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서독의 사용자들 또한 동독 지역에서 경쟁업체들이 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 지역의 경쟁업체들이 저임금을 무기로 해서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바람직하지 않은 연합이 형성되면서 제대로 된 사회적 체계를 갖추지 않은 급속한 임금 인상이 이루어짐으로써 동독 지역은 생산성 측면에서 매우 취약한 기반을 가지게 됐다. 이는 바로 대량해고로 이어졌다. 노동시장과 고용연구소(IAB)의 추산에 따르면 89년과 91년 사이 동독 지역에서는 250만 명 이상이 실업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91년 서독 지역의 실업률은 6.2%였고 동독 지역은 10.2%였다. 이후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여 통일 후 첫 10년 동안은 동독 지역에서 심지어는 5분의 1이 실업 상태인 시기도 있었다.
 
국가에서는 재교육과 공공 부문 고용촉진정책을 통해 상황을 개선하려고 시도했지만 다수의 동독 지역 주민들은 일자리를 잃는 고통을 겪었다. 다만 두둑한 연금을 챙기게 된 은퇴한 노인들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서 서독으로 이주를 많이 했던 젊은이들은 그러한 어려움을 크게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자동차 지역 작센’ 프로젝트를 통해 자동차 클러스터를 구성하는 모든 기업이 이 지역에 모이게 됐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자동차 지역 작센’ 프로젝트를 통해 자동차 클러스터를 구성하는 모든 기업이 이 지역에 모이게 됐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관리소]

가장 중요한 산업 정책으로는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해 현대적인 ‘산업 핵심 지역’을 보존하거나 새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중부 독일 화학 삼각 단지’가 이에 해당한다. 작센주에 조성된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클러스터도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이곳에는 폴크스바겐과 BMW, 포르셰가 5개의 차량 및 엔진 공장을 건설했다. 약 780개의 부품과 장비 및 서비스 공급 협력 업체들이 위치하고 있어서 ‘자동차 지역 작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독일 내 이 분야 최고의 입지가 됐다. 자동차산업 종사자가 9만5000명을 넘어 작센주에서는 가장 중요한 분야로 자리매김했다. 전체 산업 총 매출의 4분의 1 이상과 전체 수출 매출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클러스터들, 예를 들면 태양광패널과 같은 분야들은 상대적으로 지속성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신연방주 수출 비중, 서독쪽보다 낮아
 
그렇다면 경제화폐통합 이후에 나타난 산업 붕괴 현상을 피할 수 있었을까? 고려 대상에는 속해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던 한 가지 아이디어는 전체 동독 지역을 독일 내에서 하나의 특별경제구역으로 지정해 특수한 임금 및 가격 체계를 적용함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동독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동독 지역으로 유입된 막대한 보조금은 경제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온당치 못한 측면이 강했지만, 동독 시절에는 동유럽 사회주의권 국가 중에서 가장 잘살았던 동독 주민들을 재차 시대 전환의 커다란 수혜자로 만들어 주었다. 이는 동독을 다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말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었고 반면에 언제나 잘사는 서독만 비교의 대상이 됐다.
 
통일 이후 동독 경제는 상대적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였으며 서독의 수준에 근접하였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격차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기업의 밀도가 떨어지고 연구와 기술 분야에서의 안정적인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적으며 수출 부문도 상대적으로 약하다. 실업률은 2009년 금융 위기 이후에 시작된 호황 국면을 겪으면서 확연하게 낮아졌다. 지난해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6.4%였으며 서독은 4.7%였다. 거의 완전고용 상태라 볼 수 있다. 현재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실업률이 다시 올라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번역: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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