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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기 曰] 은유의 성찬 속에서

홍병기 중앙CEO아카데미 원장

홍병기 중앙CEO아카데미 원장

미국의 인기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마지막 시즌에 나오는 장면이다.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클레어 언더우드의 백악관 참모들이 배후 지지 세력의 이권이 담긴 규제 폐기 법안의 이름을 정하느라 고심을 거듭한다.
 

쏟아지는 정치 구호들의 이면에 숨겨진
뜻과 의미 제대로 알아 들어야 살아남아

“종합안전법? 위험규제 폐지법?” “안전향상법은 어때?”
 
“… 법 이름엔 ‘미래(Future)’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그럴듯해”
 
결국, 여러 단어를 조합한 끝에 ‘보편적인 독성 및 위험 규제 근절 연방법’이라는 애매한 단어들의 머리 철자를 따서 약칭 ‘Future 법’으로 명명키로 결정한다. 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원뜻과는 거리가 먼 언어 표현이 갖는 함정과 한계를 상징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언어는 뜻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이중적 성격을 띤다.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핵미사일을 ‘국가 평화의 수호자’로 명명하는 식이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주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애매하거나 모순된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고 풍자했다. ‘불경기’ 대신 ‘경기 순환’으로, ‘가격 인상’ 대신 ‘가격 현실화’로 둘러대는 게 바로 ‘오웰식’ 언어라고도 불리는 이중화법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목격된다. ‘신용불량자’ 대신 ‘채무이행 지체자’라든지, ‘방사능 폐기물’ 대신 ‘원전 수거물’이라 부르는 식이다.  ‘지구온난화’는 ‘기후변화’로, ‘상속세’는 ‘사망세’로 중화되고, ‘전자팔찌’는 ‘안심 밴드’로, ‘슬로푸드’는 ‘정성 음식’으로 미화된다.  
 
어떤 집단이나 세력의 이데올로기가 담길 경우엔 ‘고상한’ 표현으로까지 발전된다. ‘고문’은 ‘선진 신문’, ‘납치’는 ‘특별 인도’, ‘독재’는 ‘민주집중제’로 부르는 식이다. 중범죄자들의 형을 면제하고 군인으로 징발할 때 쓰는 ‘도덕적 면제권’이라는 표현은 가히 압권이다.
 
이중적 은유의 단어가 갖는 정치적 위력 때문인진 몰라도 정치권에서는 정치 구호를 놓고 늘 ‘프레임’ 논쟁을 벌인다.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선 미국 선거에서 민주당이 번번이 공화당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주장한다. 2000년 대선만 봐도 공화당 후보인 조시 부시는 ‘세금인하 (tax cut)’ 주장을 교묘하게 ‘세금구제(tax relief)’라는 애매한 말로 바꿔 말하기 시작했다. 세금은 ‘고통’이라는 은유를 연상시키고, 이를 없애주는 ‘구세주’라는 이미지가 곁들여지면서 지지율이 뛰어올랐다.
 
실제로 말 한마디가 사람들의 생각마저 바꿔놓는다. 미국의 한 TV 쇼에서 행인들에게 즉석에서 ‘오바마케어’와 ‘저렴한 건강보험법’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 물었다. 오바마케어는 싫지만 저렴한 건강보험법은 좋다는 응답이 압도적이었다. 사실 그 두 개의 법안은 같은 법인데도 말이다. ‘저렴한’이라는 이미지를 증발시키기 위해 공화당에서 ‘오바마케어’라는 새로운 프레임의 이름을 반복 사용하면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놨기 때문이다.
 
헷갈리긴 우리도 마찬가지다. ‘국회 관행의 정상화’인지 ‘거대 여당의 독주’인지, ‘검찰 개혁’인지 ‘검찰 다스리기’인지, ‘비과세 감면 축소’인지 ‘증세’인지 모를 일이다. 의혹이 제기된 정의기억연대의 ‘정의’는 부정이라는 뜻으로 유통된다. 더불어민주당에 ‘더불어’가 없고, 미래통합당에 ‘미래’가 안 보인다. ‘협치’라 써놓고 각각 ‘단독’, ‘파행’이라 읽는다. 말을 놓고 정말 말들이 많다.
 
지난주 21대 국회는 첫 월급으로 300명의 의원에게 1063만원씩을 지급했다. 정식 개원도 못 했는데 약장수처럼 정치적 언어를 쏟아낸 대가라 치기엔 너무 씁쓸하지 않은가.  
 
이제 정치적 은유가 넘치는 말 홍수 속에서 말귀를 제대로 알아들어야 살아남는 시대다. 우리 모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홍병기 중앙CEO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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