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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하노이 ‘훈수’에 불만…김여정, 청와대에 “배신자” 말폭탄

김정은·여정 남매가 문재인 정부에 등 돌린 막전막후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북측 마술사가 5만원권을 100달러 지폐로 둔갑 시키자 문재인 대통령이 파안대소하고 있다. 연락사무소 폭파 등 북한의 도발 행동이 이어지면서 남북관계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매직쇼로 끝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중앙포토]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북측 마술사가 5만원권을 100달러 지폐로 둔갑 시키자 문재인 대통령이 파안대소하고 있다. 연락사무소 폭파 등 북한의 도발 행동이 이어지면서 남북관계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매직쇼로 끝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중앙포토]

김여정 스스로 ‘말 폭탄’이라 부를 만큼 거칠고 자극적이다. A4 용지 7쪽 분량의 장문엔 원망·비방을 넘어 저주 섞인 표현까지 등장한다. “채신머리 역겹게 하고 돌아가니 그 꼴불견 혼자 보기 아깝다”며 문재인 대통령을 조롱한다. 고위 탈북 인사가 “남매의 한이 담긴 듯하다”고 말할 정도다. 지난 17일 나온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담화 얘기다. 북한 문제라면 극한의 인내를 보여주던 청와대도 즉각 발끈하며 “무례하고 몰상식한 행위”(윤도한 국민소통수석)라고 받아쳤을 정도다. 2년 전 평창 겨울올림픽 특사로 방한해 오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화 사절’로 자리매김했던 김여정은 온데간데없다. 그녀가 표면적 이유로 내세운 대북전단 문제가 어제오늘의 이슈가 아니란 점에서 더 깊숙한 배경과 속사정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걸까.
 

“영변 내놓으면 북·미 타결되나”
김정은 서울로 3차례 확인 전화
국민 세금으로 지은 사무소 폭파
파괴적 행태 그냥 넘겨선 곤란

“하노이로 향하는 전용 열차 안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서울로 3차례 전화를 걸었다. ‘영변만 내놓으면 틀림없는 거냐’며 북·미 정상회담에 임하는 워싱턴의 전략과 분위기를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에 캐물은 것이다.”
 
막후접촉 사정에 밝은 한 대북 전문가는 이렇게 귀띔하며 남북관계에서 파열음이 나오기 시작한 시점을 지난해 2월로 꼽았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첫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뜻밖의 승기를 거머쥔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 2차 회담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가까워진 문 대통령이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고, 한·미 채널로 파악된 미국 쪽 분위기를 전달해줬다.
 
하지만 협상 테이블 상황은 확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α’를 요구했고, “김정은이 협상에 임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며 판을 깨고 워싱턴으로 돌아가 버렸다. 평양까지 3800㎞ 거리를 열차로 60시간 넘게 달려야 하는 귀환길은 김정은에게 말 그대로 굴욕이고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시간이었다.
  
“우리 오빠 두 번 망신당해”
 
두 달 후 평양 최고인민회의에 나온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오지랖 넓은 중재자”란 비난을 퍼부었다. 6월 말 판문점 남북·미 회동에 나온 김정은의 표정은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트럼프와 만남에 반색하면서도 문 대통령에게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덥지 못하다’는 시그널을 연신 보냈다. 가끔 어색한 미소만 흘렸다. 얼마 뒤 문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북한은 폭발했다. ‘2032년 서울-평양 공동올림픽’과 ‘2045년 통일’을 언급하며 평화경제를 강조한 문 대통령에게 북한은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거칠게 비방했다. 서울~평양 핫라인이 불통되고, 북측에서 “남조선 당국과 마주 앉을 생각 없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특이한 건 북한이 지난해 대남 비난 과정에서부터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줄기차게 요구한다는 점이다. 겉으로 드러난 뚜렷한 마찰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내막을 모르는 이들은 ‘저지른 잘못’이 뭔지 어리둥절하다. 이와 관련 복수의 대북 정보 관계자와 경협 사업가들은 “하노이 노딜에 대한 책임이 문재인 대통령과 참모에게 있다는 게 북한 당국의 인식”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해외에서 만난 북측 인사가 ‘우리 최고 존엄이 문 대통령을 신뢰했다 큰 망신을 당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베이징의 북한 통전부 관계자로부터 ‘탁현민(현 청와대 의전비서관)을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고 귀띔했다. 하노이 협상 타결을 믿고 남측 당국과 탁씨의 조언에 따라 이벤트까지 준비했는데 허사가 됐다는 얘기다.
 
주목할 점은 김여정 제1부부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우리 당국을 “배신자”로 지칭한다는 점이다. 김여정은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깨깨(‘하나도 남김없이 몽땅’이란 의미) 받아내야 한다”(6월 13일 담화)며 ‘쓰레기’(대북전단을 날린 탈북민)보다 이를 방관한 ‘배신자’를 더 앞세우고 있다. “못된 짓 하는 놈보다 못 본 척하거나 부추기는 놈이 더 밉더라”(6월 4일 담화)고 주장한 연장선이다. 하노이 불만이 쌓인 데다, 5월 말 대북 전단까지 터지자 “우리 오빠를 두 번 망신줬다”는 생각에 전면에 나섰다는 게 대북 소식통의 분석이다.
 
6월 들어 파상 공세를 펼쳐온 김여정의 대남 대립각 세우기는 오빠 김정은에 의해 일단 제동이 걸린 모습이다. 23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를 주재한 김정은이 “대남 군사행동 계획을 보류하라”고 지시한 때문이다. 북한은 도발 드라이브를 걸면서 치밀하게 단계적 장치를 만들었다. 김여정이 주 공격수로 나서면서 군사 행동은 총참모부에 넘겼다. 총참모부는 중앙군사위에 승인을 받는 절차를 밟게 했다. 김정은은 중앙군사위 본회의가 아닌 ‘예비회의’라는 걸 열었다. 여차하면 본회의에서 보류 조치를 해제하거나 입장을 바꿀 여지를 남긴 것이다.
 
당초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를 위협과 도발의 최고 수위로 잡았을 가능성도 있고, 대남 전단 살포나 전방 확성기 방송 재개 준비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했을 공산도 크다. 대북제재로 교과서 만들 종이도 없다던 북한이 1200만장의 컬러 전단을 만들려면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교과서 용지 없다더니 전단 1200만장 찍어
 
고작 3㎞ 가청거리의 낡은 스피커로 23㎞ 밖에서도 잘 들리는 한국군의 대북방송에 맞서는 게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다는 판단도 했을 법 싶다. 남풍(남→북)이 주로 부는 여름철에 대남전단 살포를 공언한 것도 패착이다. 우리 국민의 대북 여론도 악화일로다. 무엇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방역에 북한도 다시 긴장하는 분위기다. 김정은이 중앙군사위를 사상 처음으로 화상회의 방식으로 진행한 건 눈여겨볼 대목이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김정은의 ‘군사행동 유보’는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유야무야 넘길 순 없다. 국민 세금 170억원이 투입된 남북 교류의 상징 건물을 무자비하게 폭파시킨 김정은·여정 남매의 맹동주의적 노선엔 따끔한 질책과 재발 방지 조치가 필요하다.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금강산 면회소 등을 몰수·동결했던 것과는 결이 다르다. 불만이 있더라도 대화 테이블에서 풀어야지 막말과 건물 폭파로 치닫는 건 외교도 대남도 아닌 야만이다.
 
군사합의나 연락사무소 파기를 위협하는 김여정 담화에 “대화를 하자는 의미”라는 낙관적 풀이로 국민의 화를 돋우고, 북한으로부터도 “말귀를 못 알아 듣는다”고 힐난 받는 정치권 인사들은 이제 입을 다물었으면 한다. 평양을 향한 짝사랑은 유효기간을 넘긴 지 오래다. 북한은 통일전선사업의 ‘대적(對敵) 사업’ 전환을 공식화했다. 또 김정은의 대변인이자 2인자인 김여정은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적(敵)은 적일 뿐”이란 말을 던졌고, 남북관계 속기록에 또렷하게 담겼다.
  
북한도 “운전자론 무색” 주장
 
이른바 대북 전문가들도 심기일전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 맞춰 “북한이 영변을 양보하는 건 통 큰 비핵화 조치”라고 운을 띄우자 일부 관변 학자들은 “영변이 북핵의 80~90%이고, 어쩌면 전부”라는 식으로 맞장구를 쳤다. 지금 문재인 정부 장관·안보실장·국정원장과 주요국 대사를 비롯한 요직을 거머쥐면 2년 남짓 따뜻하게 권력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교수·박사·연구원 등의 코드 맞추기와 막차 타기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잿밥에 관심이 쏠려 있으니 제대로 된 분석이나 전망·대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
 
문재인 정부 남은 임기 2년은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결정적 시점이 될 수 있다. 냉철한 대북 인식과 로드맵을 갖고 김정은 체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위한 전략을 짜야 한다. 북한 입맛에 맞추거나 따라가는 방식의 회담과 교류는 사상누각이란 게 이번 사태의 교훈이다. 2018년 9월 방북 때 문 대통령이 15만 평양 시민 대중연설을 한 걸 두고 북한이 왜 볼멘소리를 하는지, 옥류관 주방장까지 나서 왜 대통령을 타박하는지 국민은 알 필요가 있다. 정상회담 막후를 책임진 정의용 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둘러싼 잡음에 답해야 한다. 북한의 공연한 트집 잡기라면 당당하게 따져 묻는 대국민 서비스를 하는 게 공복의 도리다.
 
최악은 북한 최고지도자 남매가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6차 핵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도발에도 불구하고 2018년 새해 벽두 유화적 신년사와 평창 겨울올림픽 특사 파견에 현혹됐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북한에 단 하나의 최고 존엄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5178만명의 존엄한 국민이 있다는 결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북한과의 현란하고 어지러운 판당고(Fandango·스페인 춤)는 여기까지면 족하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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