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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퍼스펙티브] 돈 떨어진 북한…“물과 공기로만 사는” 나라는 없다

대북 제재와 코로나19 사태로 전례 없는 위기 오나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해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물과 공기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올해 북한 경제를 분석한 보고서는 섬뜩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지난 1월 한국은행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북한의 가치저장용 달러와 거래용 달러가 감소하면 환율과 쌀값이 불안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달 “2020년 북한경제, 1994년의 데자뷔인가”라는 보고서에서 제2의 고난의 행군 가능성을 예고했다. 대북제재에다 코로나19 사태로 전례 없는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대북 제재 고통과 벼랑끝 전술
전세계는 “비핵화 위한 진통”
핵과 경제의 병진 노선은 망상
비핵화만이 고난의 행군 막아

북한이 대북 전단을 핑계로 한국 때리기에 나선 배경에도 심각한 경제난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대세다. 남측이 대북제재에서 이탈해 ‘북한 퍼주기’에 앞장서라는 협박이다. 뒤집어 말하면 북한 경제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다. 우선 ‘제재 효과=제재의 강도×시간’이다. 유엔 안보리는 2016년 4차 핵실험 이후 4중의 제재 그물망을 차례로 쳤다. 〈그림 참조〉 대북 제재도 이 법칙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북한 목을 조르고 있다. 이미 북한의 수출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에 비해 수입은 생존을 위해 밀가루·설탕·식용유 등의 생필품을 계속 사들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대중 무역적자는 지난해 23억7000만 달러로 늘어나 북한 보유 외화가 고갈되고 있다.
 
북한 경제 구조는 매년 무연탄 수출 10억~13억 달러, 의류 임가공 수출 7억 달러, 해외 파견 노동자 임금 3억 달러, 수산물 수출 1억5000만 달러 등의 큰 덩어리로 짜여 있다. 이렇게 번 외화로 생필품 수입에 따른 20~30억 달러의 무역 적자를 메워 왔다. 하지만 이런 돈줄이 완전히 말라버렸다. 작년 12월에는 9만명의 해외 파견 근로자들이 송환됐다. 북한은 ‘연수’ ‘유학’ 명목으로 다시 중국·러시아 등지에 내보냈지만, 코로나19는 이런 통로조차 막아버렸다. 코로나에 따른 국경 폐쇄로 중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진 것도 치명타다. 중국은 120여만명의 관광객을 북한에 보내 최대 3억6000만 달러의 수입을 안겨주었다. 이런 달러 박스가 모두 차단되면서 북한은 금단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KDI는 보고서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북한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전 세계에서 가장 크게 피해를 본 나라”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국경이 봉쇄돼 인적이 끊어진 중국의 단둥 세관. 대북 제재로 북한의 수출이 치명타를 입은 데 이어 코로나 사태가 겹치면서 북한의 대중 수입과 해외 돈줄마저 말라 버렸다. [연합뉴스 ]

코로나19 사태로 국경이 봉쇄돼 인적이 끊어진 중국의 단둥 세관. 대북 제재로 북한의 수출이 치명타를 입은 데 이어 코로나 사태가 겹치면서 북한의 대중 수입과 해외 돈줄마저 말라 버렸다. [연합뉴스 ]

최근 북한의 경제위기를 읽을 수 있는 두 가지의 징표가 있다. 하나는 채권 발행이다. 북한은 17년 만에 공채를 발행해 반강제로 국영기업과 일명 ‘돈주(신흥자본가)’로부터 외화를 거둬 국가 예산의 60%를 충당할 움직임이다. 심각한 재정난을 덜고 환율 안정을 노린 포석이다. 또 하나는 원산 갈마 해안관광지구 건설이다. 평양의 아파트 건설은 ‘돈주’들과 함께 ‘돈을 넣고 돈을 먹는’ 방식이지만 원산 갈마지구는 오로지 통치 자금으로 세우고 있다. 그런 원산 갈마지구가 2018년부터 완공이 세 번이나 연기된 것은 통치자금에도 적신호가 켜졌다는 의미다. 심상치 않은 일이다.
 
여기에다 미국 농무부는 올해 북한 쌀 수확량을 1994년 이후 최저치인 136만t으로 전망했다. 화학 원료 부족으로 비료 생산의 급감을 치명타로 꼽았다. 남측은 2010년 이후 5·24 조치에 따라 대북 쌀·비료 지원을 끊었다. 그럼에도 대남일꾼들은 해마다 “쌀 40만t, 비료 30만t” 카드를 끊임없이 들이밀었다. “비료는 곧 쌀이고 쌀은 곧 사회주의”라며 “5~6월 적기에 뿌리려면 4월 말까지 비료가 들어와야 한다”고 매달렸다. 그런 비료가 올봄엔 코로나19로 중국산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이 자꾸 어른거리는 이유다.
 
집안 사정이 기울면 염치를 내려놓고 이웃에 공손히 손을 벌리는 게 상식이다. 거꾸로 북한은 남쪽을 향해 패악질을 부리고 있다. 작년 2월 하노이 ‘노딜’ 이후 초조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간이 북한 편이 아닌 만큼 가만히 말라죽기 전에 가장 만만한 한국부터 때려 판을 흔들고 있다. 그래야 재선을 앞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달래기에 나설 것이란 기대가 깔려있다. 중국도 한반도 평화와 안정이 우선인 만큼 긴장이 고조돼야 대북 원조에 나설 것이란 계산을 하고 있다.
 
촘촘한 대북 제재 그물망

촘촘한 대북 제재 그물망

하지만 북한의 도박이 의도대로 굴러갈지는 의문이다. 대북제재의 목표는 북한에 고통을 가하는 자체보다 그 고통을 통해 핵 야욕을 좌절시키고 비핵화를 끌어내는 데 있다. 따라서 북한이 거칠게 나올수록 북한의 계산과 정반대로 상황이 흘러갈지 모른다. 단기적으로 북한에 끔찍한 고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비핵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이라는 세계적 여론이 형성될 소지가 있다.
 
북한이 엉뚱한 곳을 긁고 있는 것도 문제다. 북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한·미 워킹그룹을 남북관계의 파탄 주범으로 지목하자 국내 진보진영도 “한·미 워킹그룹이 족쇄”라며 맞장구쳤다. 하지만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오히려 한·미 워킹그룹이 없어지면 문재인 정부는 미 재무부, 상무부, 검찰 등을 쫓아다니며 각 부처별로 제재 면제를 요청해야 할 판이다. 한·미 워킹그룹의 패스트 트랙을 밟지 않으면 사실상 대북 지원이 불가능한 셈이다.
 
또 대북제재는 유엔 안보리 차원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확실한 비핵화의 담보 없이는 ‘대북제재 완화 또는 해제’ 자체가 어려운 구도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영국은 “북한 핵은 실질적인 위협”이라며 “런던은 미국 LA보다 북한의 핵 탄도미사일에 훨씬 더 가깝다”는 입장이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한·프 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 때까지 제재는 계속돼야 하며 한국도 국제 공조에 협력해 달라”고 압박했다. 따라서 미국만 설득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미 대북제재 완화는 복잡한 국제 함수가 돼 버렸다.
 
북한 통일전선부는 “휴전선 부근에서 남측이 몹시 피로해 할 ‘일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언제든 군사적 도발이 가능하다는 협박이다. 그나마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그제 군사 조치를 보류시킨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일시적 속도 조절인지 꼬리 내리기인지는 두고 봐야 할 대목이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최근 “북한은 갈 데까지 가야 남한도 변하고 미국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 북한의 속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읽은 대목이 아닐까 싶다. 북한이 더는 잃을 게 없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벼랑 끝 전술과 미치광이 전략을 다시 꺼내 들 수 있는 의미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해진 것이 있다. 북한은 비핵화 없이는 무엇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북 제재 해제는 물론 완화조차 불가능하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면 북한 경제는 질식할 수밖에 없는 것도 불편한 진실이다. 더 이상 핵도 갖고 제재도 푸는 이른바 병진(並進)노선은 망상이고 신기루일 따름이다. “물과 공기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세상은 없다. 북한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제2의 고난의 행군으로 가는가
1994년 고난의 행군은 구조적 문제와 돌발적 변수가 얽힌 비극이었다. 당시 동구권 붕괴로 러시아의 대북 지원이 확 줄어든 것은 시대적·구조적 문제였다. 여기에다 그해 8월 대홍수가 덮쳤다. 나무를 베어내고 개간하는 바람에 북한 땅의 75%가 ‘100년 만의 대홍수’에 잠겼다. 중국 역시 한·중 수교(1992년) 직후여서 대북지원에 소극적이었다. 북한의 중국산 식량 수입은 93년 74만t에서 이듬해 30만t으로 반 토막 나버렸다. 고난의 행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북한의 1인당 쌀 배급량은 600g에서 350g까지 줄어들었고, 이마저도 곧 중단됐다. kg 당 50원이었던 쌀값은 230원까지 치솟았다. 배급이 끊어지면서 북한 전역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50만 명(UN 조사) 이상이 굶어 죽었다.
 
이번에도 북한은 대북제재라는 구조적 요인에다 코로나19라는 돌발 사태가 덮친 게 94년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노동당이 아니라 장마당이 먹여 살린다는 게 결정적으로 다르다. 물론 평양 등 일부 대도시는 여전히 배급제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 평양조차 대북제재로 인해 “두 달 이상 배급이 나오지 않아 민심이 흉흉하다”는 보도가 꼬리를 물고 있다. 돌아보면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배급제가 남아 있어 저항다운 저항이 없었다. ‘저항=배급 중단’이므로 저항은 곧 굶어 죽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장마당이 생명줄이어서 장마당 단속을 나온 보위원들에게 집단 반발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달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북·중 접경지역인 양강도 혜산 등 주요 장마당이 폐쇄되자 상인들과 보안원들 사이에 집단 충돌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지금이 94년 고난의 행군 때보다 더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런 탓에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도 바뀌고 있다. 집권 초기인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주석 100주년 열병식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선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지금껏 목숨처럼 지켜온 존엄을 팔 수는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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