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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영국 좌파 애틀리 총리, 6·25 파병 왜?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내일로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다. 소련에서 받은 탱크 등으로 중무장한 북한이 1950년 이날 새벽 대한민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유엔군 참전과 중국인민지원군(당시엔 중공군으로 표기)의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수많은 나라가 참전했지만 유난히 주목되는 나라가 영국이다. 당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좌파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1883~1967년, 재임 45~51년)가 집권 중이었기 때문이다. 복지는 좌우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진화했지만, 당시 노동당 정권은 고전적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했던 산업 국유화와 계획 경제까지 추구했다.
 

산업 20% 국유화 내정은 좌향좌
대외정책은 공산제국 팽창 경계
북한 침략하자 즉각 병력 보내
안경 등 복지비 깎아 파병비용 마련

그런데도 영국은 북한군이 남침하자 즉각 홍콩에 주둔한 병력과 군함을 한반도에 급파해 공산주의에 맞섰다. 영국은 6·25전쟁에서 한국·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해 1078명의 전사자를 냈다. 내정에선 좌파 색채가 뚜렷했던 애틀리 총리는 왜 한반도에 파병해 공산주의에 맞섰을까?
 
1950년 6월 홍콩 주둔 영국 군함과 병력이 출동하고 있다. [사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1950년 6월 홍콩 주둔 영국 군함과 병력이 출동하고 있다. [사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애틀리는 영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처음 치른 45년 7월 총선에서 ‘미래를 맞이하자(Let us face the future)’라는 구호를 내세워 압승하면서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1874~1965년, 총리 재임 40~45년, 51~55년)에 이어 총리에 올랐다. 국민은 새로운 사회를 요구했고 애틀리는 이에 호응해 전후 사회 재편에 나섰다. 46년 말 우선 잉글랜드 은행에 이어 생산성이 떨어지고 툭하면 노사쟁의가 일어났던 석탄 산업을 국유화했다. 48년까지 항공·철도·화물차·운하·유무선 통신·전기·가스 분야와 방송·전신전화·전철·버스 등 대부분의 공공서비스를 국유화했다.
 
자본주의가 탄생한 영국에서 주요 생산수단과 서비스의 국유화 정책을 추진했으니 파장이 클 법도 했지만 애틀리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부드러운’ 정책으로 이를 피해갔다. 원 소유주에게 충분한 보상을 했으며 과정을 중시해 사회적 불편이나 공포를 부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요란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고 소리 없이 개혁을 실천해 사회를 대대적으로 바꿔 놓았다. 2차대전이라는 비상시기에 산업의 국가통제와 계획 경제에 이미 익숙했던 국민은 이를 별 불편 없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애틀리의 노동당 정권은 전체 산업의 20%를 국유화했다.
 
애틀리의 업적 중 하나가 국민건강시스템(NHS)이다. 46년 국민보험과 함께 제도화한 NHS는 세금으로 전 국민에게 무상의료를 제공한다. 의사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일반의는 개인 개업이 가능하도록 하는 타협안으로 풀었다. 주택 분야에선 51년까지 100만 채를 새로 짓고 50만 채를 보수하는 공급 사업을 펼쳤다. 실업수당·노령연금 제도도 탄탄하게 확립했다. 전시인 44년 마련했던 버틀러 교육법을 47년부터 적용해 15세까지 무상교육을 제공했다.
 
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애틀리 영국 총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지도자(왼쪽부터). [사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애틀리 영국 총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지도자(왼쪽부터). [사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이렇듯 애틀리가 좌파 정책을 추진하자 노동당 좌파세력은 47년 ‘계속 좌향좌(Keep Left)’란 구호를 앞세워 미국과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영국이 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구심점을 맡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3 세력으로서 균형자 역할을 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애틀리의 대외정책은 좌우가 아닌 국익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소련이 전후 점령한 동유럽 지역에 공산 위성정권을 수립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세계 평화와 영국의 국익을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과 손잡고 49년 4월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의 집단방위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창설에 앞장섰다. 49년 8월 소련의 첫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로 동서 냉전은 더욱 가속화했다.
 
애틀리는 소련은 물론 영국 공산당과도 멀리하면서 가까이하는 노동당원을 제명했다. 국민 지지 속에 내정개혁을 이루고 복지국가를 건설하려면 소련이나 공산당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국민에게 확신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애틀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호응해 한반도에 파병하고 북한 침략군, 나중엔 중공군과 맞섰다. 애틀리는 안경과 틀니 무료 제공에 필요한 복지예산을 깎아 6·25전쟁 전비를 비롯한 냉전 재무장 비용 47억 파운드를 마련했다. 영국군은 51년 4월 22~25일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일대에서 벌어진 임진강전투(적성전투·설마리전투라고도 함)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한 발의 총알을 다 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해 중공군의 서울 진격을 저지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 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방어선을 강화했고 중공군은 다시는 서울을 넘보지 못했다.
 
영국 왕실이 거주하는 윈저성의 전시실 벽엔 ‘IMJIN’이라고 또렷하게 적힌 임진강 전투 기념 팬던트가 걸려있다. 애틀리는 자유세계를 공산 제국주의의 팽창에서 보호하고 세계 평화를 지키는 데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내외적으로는 자유세계와 공산세력이 부딪히고, 대내적으로는 국민의 복지요구가 커지는 시대를 현명하게 헤쳐 나갔다. 애틀리의 리더십은 6·25 전쟁 발발 70주년을 앞두고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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