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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남(南)으로 가는 멀고 좁은 길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파묘(破墓)가 유행이다. 국립묘지 안장 자격 박탈하기. 얼마 전 도올이 뜬금없이 이승만 대통령 파묘를 주장하더니, 일파만파, 친일반민족 행위자 파묘법안을 개정 발의하겠다는 당찬 초선의원도 출현했다. 현대판 부관참시(剖棺斬屍)다. 이에 화답할세라 민족문제연구소는 대전현충원에 묻힌 51명의 ‘파묘인사 묘역찾기’ 대회를 벌였다. 현충일이었다. 대학생들은 보물찾기하듯 인증샷을 찍어댔는데, 50기를 맞춘 팀에게 포상 30만원이 수여됐다.
 

파묘 논란은 현대판 부관참시
자의적 역사해석은 왜곡 불러
대의에 생명 건 적 없는 후손들
6·25 전쟁 영령 앞에 겸손해야

묘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김득모 중령, 6·25 당시 2사단 헌병대장. 주최 측이 명기한 죄목은 대전형무소 학살 핵심 가해자. 진실화해위원회 기록에 따르면, 인민군이 수원을 돌파하고 남하하던 1950년 6월 30일부터 7월 16일 대전을 내줄 때까지 형무소 재소자 700~1500여명을 처형한 사건이다. 김 중령이 대전 주둔 2사단 헌병대장이었으니 그렇게 간단히 분류했을 법하다. 그런데 이 간단한 낙인과 즐거운 인증샷이 우리가 열렬히 성토하는 역사 왜곡의 길을 열 수도 있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정의로운 외침에서 외려 역사를 짓밟는 무지한 폭력이 발원할 위험 말이다.
 
학살이 자행될 당시 그는 대전에 없었다. 2사단은 포천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의정부에 집결 중이었다. 6월 28일, 서울에서 인민군과 맞닥뜨린 그는 사단 병력과 함께 안양으로 퇴각하다가 수원 부근에서 인민군 탱크의 공격을 받아 대오에서 이탈했다. 야산 덤불에 포화가 쏟아졌지만 용케 살아남았다. 스미스부대가 오산·평택을 사수하는 동안 그는 수십 개 산자락을 타고 대전에 홀로 귀환했다. 7월 6일 새벽이었다.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2사단이 궤멸된 탓에 대기 발령 중 김백일 소장이 이끄는 1군단 헌병대장에 임명된 것이 12일, 낙동강 너머로 퇴각이 시작됐다. 인민군은 7월 16일 대전에 몰려들었다. 퇴각 2~3일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학살 혐의’가 찍혔을 거다.
 
친일반민족 행위자 색출에 혈안이 된 난시(亂視)에는 김득모 중령이 흥남부두 철수작전의 책임자라는 사실은 인화되지 않는다. 그는 회고록 『남(南)으로 가는 길』을 남겼다. 인천상륙작전을 신호로 북진이 개시됐다. 원산과 청진을 거쳐 회령까지 밀고 올라간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 선봉에 그가 있었다. 두만강을 코앞에 둔 회령에서 의외의 복병을 만난 것이 12월 초, 맥아더는 비밀리에 흥남 철수를 발령했다. 흥남부두에 피난민 10만 명이 몰려들었다. 10군단 사령관인 알몬드 소장은 피난민 승선을 거부했다. 피난민이 아니라 ‘현주민’이었고, 10만 병력과 화기 철수가 우선이었다. 적의 포탄이 눈발로 덮인 흥남 시내로 날아들었다.
 
단호한 알몬드 소장을 감화시킨 사람이 김백일 소장과 김득모 중령이었다. 자유를 찾아 공산 치하를 탈출하는 ‘민주시민’을 엄동설한에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간언에 그가 동의했다. 낮엔 병력을, 밤엔 난민을 몰래 싣는다는 조건이었다. 12월 12일, 목선 200척에 1만 5000여 명이 남으로 향했다. 김득모 중령이 징발한 낡은 어선 군단이었다. 15일엔 LST 조치원호, 20일 LST 온양호가 2만여 명씩을 태우고 어두운 동해바다로 나섰다.
 
24일 성탄절 이브, 알몬드 소장이 진두지휘한 세 척 상선에 최후의 피난민 3만여 명이 부산을 향해 떠났다. 흥남부두는 대기하던 미 공군에 의해 불바다가 됐다. 김득모 중령이 지휘한 LST에서 아기가 1명 태어났다. 해남(海男)이라 이름을 지어줬다. 김 중령은 부산진과 장승포에 난민을 하선시켰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거기 어디에 끼어 있었을 거다. 국제시장을 개척한 실향민이 그렇게 생겨났다.
 
‘흥남피난민탈출실록’이란 부제가 붙은 책에서 김득모 중령이 회고했다. ‘가족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전시 명령 불복종에 비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세 척의 상선에선 6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전란 속 민족대이동 대열에 희망을 준 해남이는 잘살고 있을까, 장군이 된 김 중령은 해남이를 불쑥 떠올렸다.
 
혹시, 인증샷을 찍은 대학생들이나 주최 측에 올해 일흔이 된 해남의 지인 자제들이 끼어 있을까. 김 중령의 묘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가져간 시커먼 조화(弔花)가 다시 걸렸다. 파묘 인증이었다. 생사를 걸었던 험난한 길, 남으로 가는 ‘먼’ 길을 실향민들과 그렇게 건너왔건만, 아직 남으로 가는 ‘좁은’ 길은 통과하지 못한 것인가. 그 좁은 길목을 지킨다는 역사의 경비대에 면허증을 내준 사람들은 누구인가.
 
파묘 논쟁은 누구든 옮겨붙을 기세다. 당장 백선엽 장군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만주군관학교(1940), 간도특설대 장교(1943) 경력이 다부동전투의 전사적 의미를 갈기갈기 찢었다. 칠곡이 뚫렸다면 무정의 2군단과 박성철의 15사단은 부산에 도착했을 터, 남으로 가는 멀고 좁은 길은 영원히 폐쇄됐을 것이다.
 
6·25 70주년, 평화시대 후손들이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우리들은 언제 대의(大義)에 생명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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