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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뉴딜의 상징"이라 말한 美후버댐, 사실은 '서부 개척용'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빅데이터 플랫폼 운영기업인 더존비즈온을 방문, 데이터와 AI를 접목한 혁신 서비스를 개발하는 직원들과 차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빅데이터 플랫폼 운영기업인 더존비즈온을 방문, 데이터와 AI를 접목한 혁신 서비스를 개발하는 직원들과 차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한국판 뉴딜 추진의 첫 행보로 강원도 춘천의 더존비즈온 강촌캠퍼스를 방문했다. 문 대통령은 미국 대공황 시대의 뉴딜 정책을 설명하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규모 공공 토목사업을 통해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정책을 펼쳤다. 그 대표적인 것이 후버댐”이라고 했다. 앞서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대형 화면에 뜬 후버댐 장면을 가리키며 “미국 대공황 당시 대표적인 뉴딜 사업으로 건설된 후버댐”이라고 설명했다.

 

후버댐 계획은 대공황 이전

국내엔 후버댐이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시작한 건 1933년인데, 후버댐 건설 계획은 이미 1922년에 세워졌다. 댐 건설의 목적도 대공황 극복이 아니라 서부 개척이었다.
 
미국은 1800년대 중후반 서부 개척을 한 뒤 190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서부 도시 개발에 들어갔다. 서부의 대표적인 도시 라스 베가스가 시로 승격한 것도 1911년이다. 하지만 골칫거리가 있었다. 황무지 가운데 있는 이들 도시에 물이나 전기 등을 공급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연방정부 개척국(Bureau of Reclamation)의 눈에 띈 곳이 서부를 굽이굽이 흐르는 콜로라도 강의 하류였다.

 
후버댐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후버댐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개척국장 아서 파월 데이비스는 콜로라도 강 하류에 있는 볼더 협곡에 댐을 짓자고 제안했다. 이후 기술적 한계와 지질 문제 때문에 그보다 서남부로 20㎞ 정도 떨어진 블랙 협곡으로 입지가 바뀐다. 라스 베가스와 50㎞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물, 전기를 공급하기에도 적당했다. 댐 건설 계획 보고서는 1922년 완성됐다. 이게 후버댐 건설 계획의 시작인데, 댐 이름은 처음 입지 이름을 따 볼더댐으로 정해졌다.
 
의회 승인까진 6년이 걸렸다. 동부의 상하원 의원들이 “서부에만 도움이 되는 너무 비싼 프로젝트”라는 이유로 반대해서다. 결국 1928년에야 건설 계획은 의회를 통과했다. 이후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을 하면서 세계 최대 규모의 댐 건설 프로젝트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설계를 마치고 착공은 1931년에 들어갔다.
 
후버댐 건설 계획부터 착공까지 과정은 시점을 따져봐도 대공황이나 뉴딜 정책과 무관했다. 대공황의 시작은 1929년인데, 건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28년이다. ‘뉴딜’을 처음 주창한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한 때는 1933년인데, 후버댐 공사는 이미 그로부터 2년 전에 시작됐다.
 
후버댐 건설 노동자들의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후버댐 건설 노동자들의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국내에선 축소된 뉴딜 개념

다만 후버댐이 뉴딜 정책과 무관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만은 없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예산을 더 늘려 후버댐 건설 속도를 높였다. 투입되는 노동력도 늘었다. 루즈벨트 취임 이전까지 3000명대 수준을 유지하던 후버댐 건설 노동자 수는 1934년 7월 5251명까지 늘어난다. 후버댐은 예정보다 2년 앞당긴 1936년 완공된다. 건설 과정에서 창출된 일자리가 대공황 극복에 도움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후버댐이 뉴딜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평가되진 않는다. 후버댐 이름만 봐도 그렇다. 볼더댐으로 불렸던 댐은 1947년 의회 결정으로 후버댐으로 이름이 바뀐다. 착공했을 때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미국 의회는 후버댐을 “뉴딜”을 처음 외친 루즈벨트의 성과가 아니라, 그 전임인 후버 대통령의 업적으로 봤다. 후버 대통령은 1931년 “정부의 유일한 기능은 기업 발전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뉴딜의 방향과는 생각이 달랐던 대통령이었다.
 
후버댐 완공에 앞서 1935년 열린 개관식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도 “우리나라 역사 내내 대단한 공공 개선 프로그램이 있었다. 지난 2년(취임 이후부터 1935년까지)동안 우리가 한 일의 전부는 그것을 가속화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루즈벨트 대통령 스스로 후버댐이 뉴딜 차원에서 새로 추진한 사업이 아니라 이전 정부 사업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거리 구직에 나선 미국 실업자들. [중앙포토]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거리 구직에 나선 미국 실업자들. [중앙포토]

한국에서 후버댐이 뉴딜 정책의 대표 사업으로 언급되는 것은 뉴딜 정책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국내에선 뉴딜 정책이 공공 근로를 통한 대규모 건설 사업 정도로 이해되곤 하기 때문이다. 과거 정부와 정치권은 그런 관점에서 뉴딜을 설명했고, 정부 주도 토목 사업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해 세계 최대 규모로 눈에 확 띄는 후버댐을 그 사례로 제시했다.
 
하지만 뉴딜은 공공 건설 사업을 통한 경기 회복뿐 아니라 실업자 구제 제도, 다양한 복지제도 도입, 세제 개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실은 보고서에서 뉴딜을 “전통적인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 철학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적극적인 국가개입을 택한 정책”이라고 정의했다. 학계에선 뉴딜의 대표적인 성과로 후버댐보다는 다양한 사회보장 제도가 더 많이 언급된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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