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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2200개 중 2개 선택…상품공해에 빠진 퇴직연금 시장

기자
김성일 사진 김성일

[더,오래] 김성일의 퇴직연금 이야기(58)

퇴직연금 자산운용상품의 수가 많아질수록 상품 선택의 질(예컨대, 비교대상 증대, 비교속성 증대 등)이 나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제공상품을 과도하게 제시하는 것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진 Pixabay]

퇴직연금 자산운용상품의 수가 많아질수록 상품 선택의 질(예컨대, 비교대상 증대, 비교속성 증대 등)이 나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제공상품을 과도하게 제시하는 것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진 Pixabay]

 
인간의 기억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이른바 ‘매직넘버 7±2’이다. 1956년 『심리학논평』이라는 학술지에 미국의 심리학자인 조지 밀러의 ‘매직넘버 7±2’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단기로 기억할 수 있는 아이템의 개수는 7개 전후(5~9개)라는 의미다. 이를 초과할 경우 ‘정보과부하(information overload)’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일정 시간 내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정보처리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주면 오히려 최선의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것이 정보과부하의 의미다.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주면 마치 ‘정보의 공해’ 속에서 헤엄치게 한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제에서 2019년 DC형·기업형 IRP의 적립금 규모는 57조8000억 원(전체의 26.1%)으로 전년 대비 16.3% 증가, 개인형 IRP의 적립금 규모는 25조4000원(전체의 11.5%)으로 전년 대비 32.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표1〉참조).
 
 
퇴직연금제도에서 DB형은 사용자(기업)가, DC형은 근로자가, IRP는 가입자가 각각 책임을 지고 자산운용을 해야 한다. DB형의 경우 회사가 어느 정도 전문성을 발휘해 자산운용을 할 가능성이 있지만, DC형과 IRP의 경우 가입자 운용 지식 부족으로 많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퇴직연금 자산운용에서 DB형은 사용자가 은행 등 퇴직연금사업자와 협의를 통해 가입자에게 투자 가능한 상품을 안내 및 추천하는 방식으로 라인업하게 돼 있다. 문제는 사용자가 상품을 라인업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 지가 관건인데, 그럴만한 전문력이나 라인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근로자들 위해 노력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사용자가 상품 라인업을 모두 사업자에게 위탁하는 경우 근로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업자가 추천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퇴직연금 정보를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근로복지연구원 홈페이지에 공시된 퇴직연금상품 현황을 살펴보자. 2019년 4분기 기준으로 퇴직연금상품 가운데 원리금보장형은 102개, 원리금비보장(실적배당)형은 2121개로 파악된다. 사업자별로는 원리금보장형(DC·IRP가입자 대상)은 은행 26개, 생명보험사 52개, 손해보험사 24개가 제공되고 있고 원리금비보장형은 생명보험사 65개, 손해보험사 47개, 자산운용사 2009개의 상품이 가입자에게 제공되고 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런데 2018년 금융투자협회의 ‘퇴직연금 기업담당자·가입자 운용 실태 조사’에 따르면 DC형 가입자는 평균 1.7개의 상품으로 적립금을 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은 1.4개였다. 1개의 상품만 운용하는 가입자 비율도 46%(2014년 56%)로 나타났다.
 
근로복지연구원의 통계에서 보듯이 퇴직연금시장에 2200개 이상의 상품이 존재하고 사업자별로 수백 개의 상품이 제공되고 있음에도 가입자는 극히 1~2개만 선택한다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퇴직연금사업자가 가입자의 적립금 운용을 돕기 위해 양질의 상품을 선정해 제안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상품 라인업을 마치 자사가 우수한 사업자처럼 포장하기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생각해 ‘미투(Me-too)’ 라인업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혹시 많은 상품의 라인업으로 가입자의 자산운용 선택의 폭을 넓혔다고 우기는 모양새는 아닐까.
 
가입자가 선택한 상품은 고작 1.7개라는 점에서 오히려 수많은 라인업은 가입자를 질리게 해 선택의 폭을 옥죄는 결과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즉, 투자 선택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가입자가 ‘매직넘버 7±2’의 딜레마에 빠져 오히려 퇴직연금 사업자에 대한 의존도를 더 높이는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실제로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공 상품 수에 대한 적절성 여부를 논의를 시작할 때다. 근로복지연구원에 따르면 스웨덴, 칠레, 홍콩 등 개인계좌 방식으로 퇴직연금을 의무화하는 국가에서는 상품 개수에 제한을 두고 있다. 스웨덴은 1999년 연금개혁을 통해 의무개인퇴직연금계좌인 ‘프리미엄 펜션(Premium Pension)’을 도입하면서 사업자가 제안할 수 있는 펀드의 수를 최대 5개로 제한했고, 가입자는 이 중 3개의 펀드를 선택하도록 했다. 미국, 호주 등의 국가에서는 퇴직연금사업자가 제안 가능한 상품의 수에 제한을 두지 않지만, 가입자가 실제 선택하는 상품의 수는 제한적이었다.
 
일본의 경우 ‘2018년 확정기여연금법’ 개정을 통해 가입자가 선택 가능한 상품을 35개로 제한하는 상한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확정기여연금의 운용에 관한 전문위원회’를 설치하고 지정 운용방법(디폴트 옵션)의 기준을 정하고 운용상품 제공에 상한을 설정하였다. 그 이유는 아래의 [그림1]과 같이 운용상품의 수가 36개 이상이 되자 운용지시를 하지 않는 경우가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퇴직연금을 앞서 시행하는 국가들도 자산운용상품을 과도하게 제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제한을 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왜냐하면 제공상품의 수가 많아질수록 상품 선택의 질이 나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자산운용 대상상품은 중복적이고 차별화되지 않아 비교가 거의 불가능하다. 가입자의 입장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시기가 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연금학회 퇴직연금 분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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