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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 반한 한국 SF…3억5000만살 외계광물의 고단한 여정

 단편 영화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의 한 장면. 오른쪽 문지기(임우철) 캐릭터와 마주보고 있는 금속광물이 주인공 '페트라'다. 김아영 감독은 "지구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해온 광물인 황철석의 형태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사진 김아영]

단편 영화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의 한 장면. 오른쪽 문지기(임우철) 캐릭터와 마주보고 있는 금속광물이 주인공 '페트라'다. 김아영 감독은 "지구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해온 광물인 황철석의 형태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사진 김아영]

가상 세계의 관문, 공중에 떠오른 금빛 광물이 인간 형상 문지기의 질문에 답한다.  
 

올해 베를린?전주국제영화제 초청
SF 단편 ‘다공성 계곡 2’ 김아영 감독
가상 존재의 이주 여정에 난민 문제 투영
작년 올해의 작가상 후보작을 영화로

“불법 해상 도착자. 이름과 출신지가 어떻게 되나요.”  
“페트라 제네트릭스, 다공성 계곡 출신.”  
“생년월일은?”  
“3억5000만년 전.”
 
거대하고 심원한 존재인 페트라를, 문지기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이렇게 결론 낸다. “미등록 외계생명체 페트라 제네트릭스, 생년월일은 불분명. 성별은 해당 사항 없음.”  
 
SF 영화 속 외계 검문소를 그린 듯 낯설고도 흥미로운 이 풍경은 김아영(41) 감독의 단편 영화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의 오프닝 장면이다. 사람도 아닌 광물이자 데이터 덩어리인 주인공 ‘페트라’의 고단한 이주 여정에 현실의 난민 문제를 겹쳐냈다.  
'다공성 계곡 2'은 현실에서 난민들이 겪는 여정을 SF 판타지로 옮겨낸다. 페트라가 이주자 수용소에서 보게 되는 이민당국 광고 호스트(박정언, 사진)는 "문서 없는 이주자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여러 장소에 존재할수있음과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할수없게된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페트라의 처지를 못 박는다. [사진 김아영]

'다공성 계곡 2'은 현실에서 난민들이 겪는 여정을 SF 판타지로 옮겨낸다. 페트라가 이주자 수용소에서 보게 되는 이민당국 광고 호스트(박정언, 사진)는 "문서 없는 이주자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여러 장소에 존재할수있음과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할수없게된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페트라의 처지를 못 박는다. [사진 김아영]

 
실제 배우의 연기와 3D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를 결합한 화면에 시공을 초월한 신적 존재, 태곳적 바위의 목소리가 한국어‧영어‧아랍어를 넘나들며 예측불허 전개로 관객을 홀린다. 이들을 가로막는 ‘국경’이란 견고한 개념이 실은 영원히 움직이는 해저 지각판 위에 놓여있다는 깨우침이 허를 찌른다. 23분여 짧은 작품이지만 세계관의 깊이, 이미지의 상상력은 웬만한 할리우드 SF 뺨친다.
 

올해의 작가상·베를린 잇단 찬사 

SF 단편 '다공성 계곡2: 트릭스터 플롯'으로 올 초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이어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김아영 감독을 지난달 30일 전주 영화의 거리에서 만났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SF 단편 '다공성 계곡2: 트릭스터 플롯'으로 올 초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이어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김아영 감독을 지난달 30일 전주 영화의 거리에서 만났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상업 모션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했던 김 감독은 20대 중반 “세상의 문제에 반응하는 나만의 작업”을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현대미술 작가의 길을 걸어왔다.
 
지난해 동명의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올랐고, 이번 단편은 전시 영상을 영화 버전으로 만든 것이다. 올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익스팬디드 부문에 이어 지난달 28일 개막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단편 경쟁 부문에도 초청됐다. 올해 전주영화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비대면 온라인 영화제로 전환하면서 오는 6일까지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지난달 30일 전주 영화의 거리에서 만난 김 감독은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를 접하며 작품을 구상했다고 돌이켰다. “유럽에서 주로 작업하다 2018년 말 완전히 귀국했을 때 예멘 난민이 제주에 들어왔어요. 한국사회가 보여준 엄청난 이슬람 혐오,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감은 상상 이상이었죠. 이 문제를 작품으로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SF의 가능성, 현실 낯설게 보기 

2017년 작업한 전시 영상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이 토대가 됐다. 당시 호주 멜버른페스티벌에 초청받은 그는 “호주의 악명 높은 난민 정책”에서 작품을 착안했다. “호주 정부가 난민을 본토에 들이지 않으려고 인근 해안 섬 수용소에 무기한 방기해 국제 문제가 된 정책이었다”면서 “여기에 호주 내륙 불모의 땅이 주요 자원 채취로 듬성듬성해진 이슈를 바탕으로 가상 존재를 상상했다”고 했다.
 
SF 장르는 “현실의 이슈를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가능성” 때문에 택했다. “제가 미국 흑인 퀴어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 한국의 듀나 등의 SF 사변소설에 심취해있기도 하고, 우리 현실에는 이미 인간 주인공으론 설명하기 힘든 너무 많은 문제가 중첩돼 있잖아요. 페트라는 공중에 둥둥 떠서 인간적 언어를 구사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지만 분명히 현실적인 문제(이주)를 안고 있죠. 이런 이질적인 충돌에서 보다 풍부한 인식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다공성 계곡 2'에서 페트라의 여정에 등장하는 신적인 존재들은 실제 제주 예멘 난민 출신의 비전문 배우들이 연기했다. [사진 김아영]

'다공성 계곡 2'에서 페트라의 여정에 등장하는 신적인 존재들은 실제 제주 예멘 난민 출신의 비전문 배우들이 연기했다. [사진 김아영]

 

제주 예멘 난민 "세균 된 것 같았다"

내러티브가 분절돼 있었던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과 달리 이번 작품은 페트라가 겪는 여정에 초점을 맞췄다. 극 중 페트라의 입국심사 절차는 2018년 실제 예멘 난민 561명이 한국에서 도착해서 겪은 질문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지층‧파도‧돌 형상 탈을 쓴 신화적인 캐릭터는 실제 예멘 난민 출신 비전문 배우들이 출연했다.
 
김 감독은 “2019년 제주를 떠나 서울‧인천에 정착한 예멘 난민을 8명 정도 인터뷰했고 출연 허락을 받았다”면서 “이 친구들은 예멘에서 영어 교사, 국가대표 킥복싱 선수, 태권도 선수 등으로 살아왔다. 인천 아시안 게임 때 환대 속에 한국을 다녀갔던 한 친구는 난민 입장으로 왔을 때 대충격이었단다. 입국 심사 과정에서 이 세계의 면역체계를 교란하는 세균 바이러스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한국은 순혈주의 신화가 강한데 더는 이것이 존속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너무 많은 이주가 있었고 한국인도 역사적으로 외부 세력과 여러 혼인이 이뤄져 왔다”면서 “그럼에도 자꾸 공포‧혐오의 담론으로 빗장을 만든다. 난민 문제는 한국사회가 폭발 직전에 이른 내부적 불만, 불안감을 쏟아내는 데 필요한 창구였던 것 같다. 정치인들도 그런 공포를 이용했다”고 했다. “2년이 지났지만 아무 문제 없지 않느냐”며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제주 난민들의 목소리는 지워졌다. 반투명한 존재가 됐다”고 했다.
 

한국 순혈주의 신화 불가능한 시대 됐죠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19전'에 초청된 김아영 감독의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작품 속 세계관을 풀어낸 전시가 지난해 10월부터 선보였다. [사진 김아영]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19전'에 초청된 김아영 감독의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작품 속 세계관을 풀어낸 전시가 지난해 10월부터 선보였다. [사진 김아영]

이번 영화에서 그는 난민들을 슈퍼 히어로처럼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외계인 캐릭터로 설정했다. 외국인을 뜻하는 ‘에일리언(alien)'이 외계인이란 중의적 의미를 가진 데 착안한 것. 부제의 ’트릭스터(trickster)‘란 질서를 교란하는 반사회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틀을 초월해 인간생활에 필요한 것을 외부에서 가져오는 매개자, 문화영웅이란 상반된 뜻을 한 데 가진 단어다. 김 감독은 “중동 예멘에서 온 난민이 한국 사회를 교란하려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한국의 다원성을 향상하고 이종적인 피를 수혈하게 되는, 한국 사회를 더 나아지게 끌고 가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번 작품은 그가 처음 “영화제 문을 두드린” 도전이다. 전주영화제 기간 극장 상영으로 관객을 만나려던 계획은 코로나19로 인해 초청작이 온라인 상영하게 되며 예기치 않게 불발됐다. 뒤이어 초청된 제2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선 오는 20일과 22일 평창 일대 영화관에서 총 두 차례 상영하게 됐다. 베를린에서도 베를린영화제 이후 코로나19로 중단됐던 동명 전시가 이달 중 재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주하는 존재, 코로나로 트라우마

지난해 10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19전'에선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이 2채널 단편 영상 등의 형태로 전시됐다. [사진 김아영]

지난해 10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2019전'에선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이 2채널 단편 영상 등의 형태로 전시됐다. [사진 김아영]

그는 요즘 자주 쓰이는 영단어 ‘쿼런틴(Quarantine‧격리)’과 같은 제목의 호주 SF 소설을 떠올렸다. “미래 지구에서 외계 지성에 해로운 에너지가 방사되면서 외계인들이 거대한 장막으로 태양계를 격리해버리는, 지구를 ‘왕따’시키는 내용이죠. 요즘 제 심리 상태가 그래요. 결국 우리는 다 이주하는 존재잖아요. 올해 말쯤 되면 아주 많은 사람이 심리적 트라우마에 휩싸이고 폐소공포증이 심해질 것 같아요. 아포칼립스란 핵전쟁이 아니라 이렇게 서서히 우리가 다른 종류의 삶으로 접어들면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요.”
 

기회 된다면 SF 장편영화 꿈꾸죠

단편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에서 페트라의 이주가 펼쳐지는 판타지적인 세계 모습. [사진 김아영]

단편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에서 페트라의 이주가 펼쳐지는 판타지적인 세계 모습. [사진 김아영]

 [사진 김아영]

[사진 김아영]

그는 최근 한국에서 SF‧판타지의 지위가 높아졌다며 반가워했다. “SF 소설은 늘 순수문학에 배제당하고 열등한 것으로 치부돼왔는데 2~3년 사이 달라졌다. 김초엽 작가의 SF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문학상을 타는 현상이 벌어지는 걸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고 있다”면서 “실제 우리의 현실은 더는 리얼리즘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상의 세계와 중첩되고 있다”고 했다.  
 
“올해 안에 조금 작은 규모의 SF 영상을 하나 마무리짓고, 그 외에 SF 장편영화도 기회만 있다면 의욕 넘치게 해보고 싶어요. 대부분의 아티스트가 많은 강의를 뛰며 ‘투잡’하는 게 현실이지만, 일상에 함몰되지 않고 풍성한 ‘가능 세계’를 창출해서 현실의 존재들에게 자기 긍정의 힘을 전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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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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