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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불구덩이도 탈출구는 있다

신준봉 전문기자의 이번 주 이 책

소방관의 선택

소방관의 선택

소방관의 선택
사브리나 코헨-해턴 지음

영국 최고위 여성 소방관
화재 현장, 신경과학으로 분석

압박감 심하면 판단력 상실
직감·이성 동시에 활용해야

김희정 옮김
북하우스
 
다이어트를 막 시작한 당신. 그러나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단단히 마음먹고 순간의 유혹을 이겨낸다면 탄탄한 복근 혹은 만족스러운 몸매에 다가설 가능성이 크다. 물론 굴복하더라도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니다. 여러 형태의 대가(가령 스스로에 대한 실망, 계속 거추장스러운 몸매)가 따르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피해줄 가능성은 작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실패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책의 저자처럼 소방관이라면? 끔찍한 화재 현장에 긴급 출동해 무언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남에게 피해가 간다. 누군가의 소중한 재산, 그보다 소중한 누군가의 생명, 어쩌면 이 책의 저자처럼 배우자가 같은 소방관인 경우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내 가족의 안위까지도 당신의 순간적인 판단과 결정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여기서 판단과 결정이 순간적으로 내려져야 한다는 게 함정이다. 돌발상황, 변수를 찬찬히 따져볼 상황이 아니다. 화재의 한복판인 것이다. 책의 원제처럼, ‘모든 것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 순간(the heat of the moment)’, 그래서 인지능력과 감각이 흐려지고 자칫 잘못된 판단을 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극심한 압박감 때문에 정상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순간, 그런데도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다.
 
저자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83년생이니까 올해 서른일곱. 북아프리카 모로코가 뿌리인 유대계 영국인. 게다가 155㎝, 48㎏ 몸집의 여성. 아버지가 병마에 쓰러지는 바람에 10대 중반의 나이에 2년간 노숙자 생활을 해야 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열여덟에 소방 구조대원이 되지만 소수민족·여성 차별에 시달린다.
 
영국 최고위직 여성 소방관인 사브리나 코헨-해턴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사진 북하우스]

영국 최고위직 여성 소방관인 사브리나 코헨-해턴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사진 북하우스]

어느 날 소방대원 출동 현장에서 심각한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호출을 받는다. 그런데 당시 약혼자, 지금의 남편이 그 소방차에 타고 있었다. 4분의 1의 확률. 현장으로 달려가던 4분 37초가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두려운 순간이었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다행히 부상자는 약혼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동료였다. 약혼자가 무사해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에서 오는 죄책감이 비정상적으로 가시지 않았다. 이 지점이 또 하나의 선택의 순간인데, 선천적으로 투지를 타고난 데다 노숙자 생활을 하며 전투적인 생활력을 체득했다고 자처하는 저자, 자신을 옥죄는 죄책감을 장악해 좋은 일을 하는 원동력으로 삼기로 한다.  
 
비참하고 두려웠던 4분 37초를 복기해보니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스트레스가 뇌의 정보 처리 용량을 감소시켰고, 결국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방해한 것이다. 급박한 순간, 두뇌의 작동 불량은 단순히 생물학적 반응에 불과하다는 게 책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작동 불량을 체계적으로 개선해보자. 소중한 재산과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는 일이니까. 남들은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대목이다.
 
어렵사리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우리의 방송대와 비슷한 개방대를 졸업한 저자는 박사과정에 도전한다. ‘위험을 고려한 의사 결정(risk-critical decision making)’을 할 때 우리 두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중립적인 지식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책은 그 공부의 결과물이다. 물론 숱한 화재 현장 경험을 풍부하게 곁들였다. 주로 실패 사례를 제시한 후 무엇이 잘못됐는지 그래서 어떤 부분을 고쳐야 하는지 제시하는 모양새다. 논의의 도착점은 결국 인명·재산 피해를 최소화하는 소방 지휘관의 의사결정법과 그 훈련 시스템, 자신이 개발한 이 방법론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화재 현장을 책임진 소방 지휘관의 결정은 머릿속에 그려진 사건의 전체 구도 아래 이뤄진다. 그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 조각들은 그 전체 구도, 전체 그림을 이루는 퍼즐 조각들이 된다. 혼란스러운 현장, 당연히 조각들의 빈자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 순간’, 두뇌 안에 잠재의식 상태로 고여 있던 예전의 퍼즐 조각이 튀어나온다. 과거 비슷했던 사건 경험이다. 그에 따라 본능적으로 뭔가 결정을 내린다. 직관적 결정이다. 조사 결과 현장 지휘관 결정의 80%가 이전 경험을 활용해 본능적, 직관적으로 내려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 재해의 80%는 인재, 라는 통계치와 관련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직관적 결정을 무조건 배척하자는 건 아니다. 직관적 결정으로 성공한 사례도 소개한다. 분석적·이성적 결정으로 직관적 결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통찰이다. 그래서 개발한 현장 지휘관 행동 요령이 ‘결정 제어 프로세스(Decision Control Process)’. 내리려는 결정의 목표(이 결정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측(어떤 결과를 예측하나), 위험 vs 이득(이득이 위험을 능가하나), 이 세 가지를 일깨우는 문구(프롬프터)가 적힌 카드를 지참해 아무리 다급해도 현재 상황을 돌아볼 여유를 갖도록 하자는 거다.
 
책을 리더십 비결을 소개하는 경제경영서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훨씬 박진감 넘친다. 긴박한 화재 현장 묘사 때문이다. 10장 ‘다 끝난 뒤에 깨닫는 것들’은 어느 조직에나 있기 마련인 사내 정치판 풍경, 부정확한 인간 기억의 한계를 설득력 있게 전한다.
 
저자는 현재 영국에서 가장 직급 높은 여성 소방공무원이다. 웨스트서식스 소방 구조대의 소방대장이다. 저자가 개발한 의사결정법과 훈련 시스템이 영국은 물론 영국 바깥으로도 수출됐다고 한다. 한때 자신의 생계유지 수단이었던 노숙자 잡지 ‘빅이슈’ 홍보대사도 맡고 있다. e메일로 몇 가지를 물었다.
 
소방관으로 일하며 전문지식을 늘리는 것과 이번처럼 대중적인 책을 쓰는 건 다른 일이다.
“달라지고 싶어 소방관이 됐고, 나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박사 공부를 했다. 어떤 일에든 최선을 다하는 게 내게는 당연한 일이다. 뜨거운 화재 현장에서 배운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소방관은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된 직업이다. 비유로 표현한다면.
“일종의 공구박스라고 답하겠다. 각각으로는 유용하지만 한계도 있다. 그러나 힘을 합치면 우리가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첫 책인데 구성·글쓰기가 매력적이다.
“소방관은 인생 최악의 순간 혹은 가장 취약한 상태에 처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다. 감정이 무척 격해지는 경험이다. 그 경험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다.”
 
당신의 행동요령을 따라도 누군가 실패를 맛볼 수 있다. 극복하고 회복하는 방법은.
“의사결정(decision making)은 결국 기술(skill)이다. 실전 같은 훈련으로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나처럼 누군가를 구출해야 하는 직업인 경우 자존심이 방해될 수 있지만, 어려운 일이 있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것들을 솔직하게 밝히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코로나 사태 대처와 관련해 여러 나라 지도자들이 비난받는데.
“책에 쓴 것처럼 시간이 흐른 다음 되돌아볼 때 지금의 결정이 최선이었는지가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사람이다. 기계가 아니다. 사태의 맥락에서 어떤 결정이 적합했는지 판단 받아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한다.”
 
신준봉 전문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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