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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궁궐 속 관청의 색다른 매력, 창덕궁 궐내각사

기자
이향우 사진 이향우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17)

고종 때 복원된 수정전은 한 때는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되었고 후에는 군국기무처, 내각의 청사로도 쓰였다. [중앙포토]

고종 때 복원된 수정전은 한 때는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되었고 후에는 군국기무처, 내각의 청사로도 쓰였다. [중앙포토]

 
사정전 영역 천추전을 지나, 천자고 옆 작은 문을 나서면 경복궁 서편 툭 트인 공간이 펼쳐진다. 우선 2층 누각 경회루와 그 앞의 연지가 펼쳐지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경회루 연지 남쪽으로 꽤 큰 건물이 보인다. 수정전이다.
 
오늘은 수정전을 보면서 경복궁의 궐내각사 이야기를 하려한다. 고종 때 복원된 수정전은 한 때는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되었고 후에는 군국기무처, 내각의 청사로도 쓰였다. 수정전에는 큰 월대가 딸려 있어 이 건물의 격을 알 수 있고. 건물의 뒤편 동쪽과 서쪽에 행각이 설치되었던 돌 받침 흔적을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사정전 서쪽 행각에서 수정전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짐작할 수 있고 수정전의 서쪽 복도 흔적은 대전장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의 ‘씽크탱크’ 집현전

세종 2년(1420) 조선의 ‘씽크탱크(Think Tank)’라 일컬어지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세종은 학문과 정책에 대한 자문을 듣고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사진 pixabay]

세종 2년(1420) 조선의 ‘씽크탱크(Think Tank)’라 일컬어지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세종은 학문과 정책에 대한 자문을 듣고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사진 pixabay]

 
조선 초기에는 원래 이곳에 집현전(集賢殿)이 있었다. 집현전은 조선왕조의 학문, 과학, 예술의 산실로 세종 때 문치의 본산이었다. 세종 2년(1420) 조선의 ‘씽크탱크(Think Tank)’라 일컬어지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세종은 학문과 정책에 대한 자문을 듣고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정책토론과 자문, 학문 연구 및 서적 편찬, 도서 수집 및 정리 등과 같은 여러 사업을 펼치며 조선의 문화와 과학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세종28년(1446) 훈민정음이 창제되었고, 장영실에 의해 해시계·물시계를 비롯한 각종 과학 기구가 발명되었으며, 박연이 아악을 만들었다.
 
문치로 나라를 다스린 세종은 집현전 관리들에게 고금의 일을 토론하며 학문을 연마하게 한 결과 집현전에서 당대 내로라하는 문장가가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세종은 또 집현전 관리에게 일종의 안식년제와 같은 사가독서제도를 운영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는 말 그대로 임금이 특별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로 집현전 학사 중에서 재행이 뛰어난 자를 선발해 유급휴가를 주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였다. 세종의 이러한 업적을 기려 정인지는 세종을 ‘동방의 요순’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함께 집현전에서는『고려사』를 비롯한 역사서와 음운학 서적인『동국정운』, 수학 서적인『칠정산내외편』, 의학 서적『향약집성방』, 음악 서적『정간보』가 발간되는 등 다양한 분야가 고루 발전하였다.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는 시각과 24절기를 동시에 알려준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는 시각과 24절기를 동시에 알려준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세종16년(1434)에 집현전의 남쪽에 보루각(報漏閣)과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했는데, 보루각에는 자격루(自擊漏)와 같은 누기(漏器)를 두어 시각을 측정하였고, 궁성의 서북쪽 모퉁이의 간의대에서는 천문을 관측하게 하였다.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仰釜日晷, 해시계)는 시각과 24절기를 동시에 알려준다. 둥근 솥 모양을 하고 있는 해시계는 정북을 가리는 그림자 침으로 시각을 읽는데 솥의 테두리 남쪽에 ‘한양북극고 삼십칠도이십분(漢陽北極高 三十七度二十分)’라고 적고 있어서 당시에 이미 한양의 북위고도를 측정해 낸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세종은 1434년 앙부일구를 만들어 각 궁궐 뿐 아니라 종묘 앞에 그리고 사람의 통행이 많은 혜정교(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자리) 근처에 두어 일반 백성도 시각을 알게 하였다.
 

오늘날 청와대 ‘궐내각사’

수정전에서 서쪽으로 바라볼 때,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안쪽으로 넓은 마당에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궁궐의 수목은 늘 정성 들여 가꾸고 있어 무심히 보는 이들에게는 숲 그림자가 제법 여유로운 운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곳은 원래 궁내에 궐내각사가 있던 자리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 한 고종 때의 수정전이나 그 자리에 있던 집현전도 궐내각사의 영역에 속하는 관청이다.
 
궐내각사란 궐안에 들어와 있는 작은 실무 관청을 말한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를 궐외각사라 한다면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던 여러 기구들이 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왕을 보좌하고 학문 정치, 행정을 담당하며 왕의 자문기구 역할을 하던 홍문관(옥당), 왕명출납을 맡았던 승정원, 대신들의 회의 공간 빈청이 있었다. 그리고 군사시설로는 왕의 경호요원 선전관청, 왕을 호위하고 궁궐수비를 담당하던 도총부, 왕의 시중을 들던 내시의 공간인 대전장방, 내시를 통솔하던 내반원, 궁궐의 음식을 만들고 음식 담는 그릇을 조달하는 사옹원, 천문 관측기구가 있던 보루원, 관상감, 간의대, 학문 서적을 관리하던 규장각, 그리고 왕실의 건강을 담당하던 내의원, 그 밖에도 상서원, 상의원, 전설사, 사복시 등 대단히 많은 관서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곳 궐내각사 영역은 일제강점기 가장 먼저 파괴되기 시작해 현재는 수정전 이외의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우리가 일제강점기의 훼손으로 사라진 이후 당시의 실무 관리가 일하던 궁궐 안의 관청 궐내각사를 볼 수 없어 그 존재의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원래 조선시대의 모든 궁궐에는 궐내각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궁궐의 면모가 거의 망가진 경희궁은 정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궐의 남쪽으로 길게 궐내각사가 있었고, 경운궁(덕수궁)의 궐내각사는 대한문 안쪽 지금의 연못자리 주변이 궐내각사가 있던 자리이다. 물론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함께 동궐로 불리던 창경궁과 연계된 업무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경복궁의 궐내각사가 궁궐의 서편에 집중적으로 위치한 것과 달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몇 군데로 나뉘어 배치되었는데, 서문 금호문 안쪽의 서편 영역과 선정전 앞의 중앙부의 궐내각사 배치가 특징적이다. 그리고 창덕궁이 창경궁과 연계된 동궐이라는 특성 상 창경궁에도 궐내각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궁궐 대부분의 궐내각사가 훼손되었는데 현재 창덕궁 궐내각사 서편 영역이 유일하게 복구되어 조선시대 궁궐안의 관청 배치를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창덕궁 서편 궐내각사는 그곳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동안 일반적으로 경험해 오던 궁궐의 허전한 구도가 아닌 우리 궁궐의 아름다움이 주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기도 하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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