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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정의연, 회계 문제가 본질일까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마리아 로사 헨슨은 16세 되던 1943년 4월 필리핀 마닐라 부근에서 일본군에 끌려가 9개월간 위안부 생활을 했다. 상처를 감추며 살다가 92년 위안부 피해자를 찾는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용기를 내 언론 앞에 섰다. 필리핀 최초의 위안부 공개 증언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 위안부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96년 일본 단체로부터 ‘속죄금’을 받았다.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받으면 공창(公娼)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던 바로 그 돈, 아시아여성기금이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시절 조성된 아시아여성기금은 민간 모금을 기반으로 하되 재단 운영 비용은 정부가 댔다. ‘반관반민’ 성격의 기금에 정대협은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 꼼수라며 거부했다. 헨슨은 돈을 받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꿈이 실현됐다. 매우 행복하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일이었다.
 

위안부 문제 담론 독점하면서
현실 외면한 ‘이상의 탑’ 고집
결국 피해 당사자들마저 분노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불투명한 회계가 연일 도마에 오르고 있다. 비리가 드러나면 법적인 책임을 지면 된다. 그러나 그걸로 끝인가. 지난 30년 가까이 한국인 가슴 한쪽에 무겁게 자리 잡았던 위안부 운동 담론이 여기서 그친다면 너무 허무한 일 아닌가.
 
위안부 문제에는 복잡한 지점들이 얽혀 있다. 개인의 희망과 집단의 해법이 다를 수 있다. 현실론과 이상론이 교차한다. 지금까지는 이런 복합적 문제가 ‘일본의 국가적 책임 인정과 배상’이라는 지배 담론에 묻혀 왔다. 국가와 언론마저 성역을 건드리지 못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은 할머니가 61명이나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갈등을 대부분 언론이 외면해 왔다. 그 사각지대에서 위안부 단체들은 정의를 독점해 왔다.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 당사자들의 분노는 이런 닫힌 담론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다.
 
2015년 한·일 정부가 12·28 위안부 문제 합의를 발표한 뒤 일본의 진보학자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와 재일 조선인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이 합의의 백지 철회는 불가능하며, 그 위에서 다음 운동 단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이에 대해 서경식 교수는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대립이다. 하루키 교수는 한국 시민단체로부터 ‘일본인의 한계’라는 비난까지 들었다. 김대중 구명과 반(反)군국주의 활동에 앞장서며 진보 진영에서 일본의 양심이라는 소리를 듣던 그였다.
 
한국 위안부 운동 단체의 ‘비타협’ 앞에 일본 진보 지식인들은 곤혹해한다. 일본 사회 보수화 분위기 속에서 정의연 등이 주장하는 온전한 국가 책임 인정은 사실상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목표를 앞세운 강경론은 오히려 일본 내 극우파의 입지만 넓힌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차적 책임은 물론 일본이다. 마지못해 타협하면서도 자꾸만 딴소리하는 행태는 한국인의 감정선을 건드린다. ‘불가역’이라는 낯선 용어로 국민을 뜨악하게 만든 박근혜 정부의 무감각도 문제였다. 현 정부는 책임이 없나. 엄연한 국가 간 합의를 엎어버렸으면 창의적 해법을 찾아야 하는데, 파기나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는다. 반일 감정을 정권 지지의 불쏘시개로 활용하면서도 외교적 부담은 지지 않으려는 어정쩡하고 무책임한 자세다. 풀리지 않을 문제 앞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은 영원한 시시포스의 고통을 강요받고 있다.
 
정의연은 현실을 외면한 ‘이상의 탑’을 세우고 그 안에 피해자들을 가둬버렸다. 물신화된 이상 앞에서 피해자를 소외시켰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닌가.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이제 18명이다. 이들의 타계 전 일본의 ‘진정한 사과’만이 해법이라고들 한다. ‘진정’의 기준은 누가 세우는가. 민족 혹은 양심을 명분으로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누릴 기회를 뺏을 자격이 누구에겐들 있으랴.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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