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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칼럼니스트의 눈] 트럼프식 탈진실 정치와 코로나 위기

코로나 전쟁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월 28일 유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톤에 도착한 모습.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월 28일 유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톤에 도착한 모습. [AP=연합뉴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다니엘 디포는 페스트의 공포가 영국을 휩쓸던 1665년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들의 불안은 시대의 오류에 의해서도 터무니없을 만큼 증대되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예언과 점성술 주문, 꿈, 수다스러운 노파들의 이야기에 그 전 어느 때보다도 깊이 중독되어 있었는데….”(『A Journal of the Plague Year』 1772)
 

객관성과 균형감 있는 정보 전달을 목표로 삼던 미디어의 쇠락
정치이념의 극단화와 분열, 희망 잃은 노동자의 허무주의 확산
보편적 진리가 존재하기 어렵다고 보는 미국식 상대주의의 부활
미국 사회는 ‘탈진실 바이러스’에 취약한 기저질환 키워왔다

17세기 페스트에 대한 예언과 주문(呪文), 불길한 꿈과 수다는 오늘날 탈진실(post-truth)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한 요즘, 이 바이러스가 중국의 음모라느니 미국 생화학 무기의 실수였다느니 같은 괴담은 객관적 사실만큼이나 빠르게 퍼져나간다. 다니엘 디포의 후예들인 영국인들은 이미 몇 해 전 우리의 시대를 탈진실의 시대라고 부른 바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2016).
 
코로나와 탈진실에 눌려 지내는 요즘 필자의 질문은 이렇다.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를 열며 등장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11월 대선에서 코로나 패닉과 경제 추락을 딛고 재선될 것인가? 미국이 세계 최대의 코로나 확진자(백만 명 이상), 사망자(약 9만 명)로 휘청거리는 요즘, 트럼프 대통령은 과연 이 엄중한 위기를 탈진실 정치로 슬그머니 우회할 수 있을까?
 
합리적, 객관적 지표로만 따지자면,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인지, 진실이란 게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받는 시대에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판을 뒤흔들 결정적인 패를 여전히 쥐고 있다.
 
( 1 ) 첫째, 트럼프 대통령의 탈진실 선거 운동은 지지자들을 다시 한번 불러 모을 잠재력을 여전히 갖고 있다. ( 2 ) 둘째, 탈진실과 가짜뉴스가 미국 내에서만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버상에서 미국과 치열한 냉전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는 2016년 미국 대선 개입을 경험 삼아 이번에도 미국 정치를 흔들고자 할 것이다. 러시아발 사이버 프로파간다, 트롤, 해킹은 탈진실 대통령 선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변수들이다.
 
먼저 탈진실 대통령 트럼프의 잠재력부터 살펴보자. 우연하게도 정치인 트럼프의 등장과 탈진실이라는 단어의 공식적인 등장은 그 시기가 겹친다. 2016년 11월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탈진실(post-truth)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함으로써, 탈진실 현상은 우리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 2016년 11월은 알다시피 트럼프 후보가 기성 미디어의 예측을 깨고 대통령에 선출된 달이기도 하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이라고 탈진실을 정의하고 있다. 트럼프 현상과 탈진실만큼이나 잘 들어맞는 낱말의 조합도 흔치 않은 셈이다.
 
2016년 선거운동 기간 중 트럼프 후보는 탈진실의 정치를 요란하게 선보였었다. 전임 오바마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출생한 미국 시민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트럼프는 끈질기게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와 그의 출마 자격에 대해 시비를 걸고 넘어졌었다. 또한 선거 운동기간 중 트럼프 후보는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중동의 테러리스트 조직 ISIS를 만들어낸(created) 책임”이 있다고 끊임없이 공격하였다.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기만하는 주장, 감정 섞인 주장이 탈진실로 승화되려면 이를 믿고 따르는 대중이 있어야만 한다. 2016년 대선 기간 내내, 스스로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고 느끼는 백인 노동자층은 “범법자 힐러리”를 “감옥으로 보내라”는 섬뜩한 선거 구호에 열광하였다.
  
코로나19와 트럼프의 탈진실 정부
 
100년 만에 찾아온 팬데믹, 코로나 위기를 맞아 탈진실 대통령 트럼프의 입은 바빠졌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라질 겁니다. 어느 날 문득 기적처럼 사라질 겁니다.”(2월 28일) 사실은 이후 석 달간 미국 전역의 사망자 수가 1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나는 중국 바이러스를 언제나 심각하게 취급해왔어요. 그래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국경을 봉쇄했고 많은 생명을 구했어요.”(3월 18일) “4월쯤이면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바이러스는 사라질 거에요. 날씨가 따듯해지면 바이러스는 사라집니다.”(2월 10일)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로는 코로나바이러스 전파는 기온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선거 6개월을 앞두고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한번 탈진실의 마법을 동원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11월 대선을 며칠 앞둔 올가을쯤,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 위기의 종식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 새로 개발된 신약 한 가지를 마법의 백신으로 믿어 버리는 것이다. 이어서 엄청난 숫자의 우파, 극우파 유튜버와 라디오 토크쇼는 이 기쁜 소식을 미국 전역에 퍼 나를 것이다. 이쯤 되면 사회적 거리두기와 경제 불황에 지친 대중은 코로나 종식 선언을 열렬히 환영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될 수도 있다. 탈진실의 시대이므로.
 
기괴한 시나리오이지만, 탈진실 선거운동은 트럼프 대통령 개인의 유별난 개성과 개인기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정치가 탈진실의 포로가 된 것은 지난 수십 년간 쌓여온 사회적, 기술적, 문화적 변동의 결과이다.
 
몇 가지 배경만 꼽아보자. ①객관성과 균형감 있는 정보 전달을 목표로 삼던 미디어의 쇠락 ②비슷한 이념성향, 가치지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정보를 교환하고 뉴스를 접하는 소셜 네트워크의 일상화 ③정치이념의 극단화와 분열에 따른 정치 부족주의의 확산 ④하나의 진실, 하나의 보편적 진리가 존재하기 어렵다고 보는 미국식 상대주의의 부활 ⑤경제 격차의 심화와 제조업 노동에서 밀려나고 있는 노동자 계층이 희망을 잃으면서 자신을 의탁하게 된 허무주의. 달리 말하자면, 미국 사회는 탈진실이라는 바이러스에 취약한 기저질환을 이미 수십 년간 키워온 셈이다.
  
미국과 러시아의 사이버 냉전과 탈진실 정치
 
탈진실 바이러스는 미국 밖으로부터 유입되기도 한다. 미국과 러시아 간의 치열한 사이버 전쟁이 탈진실 시대 거대한 가짜뉴스 공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온라인 개입을 다양하게 시도했던 러시아의 정보기관들에게 코로나 위기는 미국을 흔들어 볼 또 하나의 기회이다.
 
보이지 않는 전장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미-러 사이버 전쟁에서, 공개된 얼굴 역할을 하는 미국 국무부 글로벌 관여센터의 레아 가브리엘 센터장은 지난 3월 5일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러시아 기관들은 미국의 정치토론을 분열시키고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를 저해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허물기 위해 (…) 사이버상의 가짜정보 공작, 프로파간다, 소셜미디어 스웜(가짜뉴스)을 퍼뜨리고 있다.”
 
정리하자면, 코로나19는 머잖아 통제될 수 있겠지만, 탈진실의 시대는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대중의 탈진실 정치에 대한 열정은 쉽게 식지 않을 것이다. 또한 사이버상의 가짜뉴스 전쟁 역시 지속될 것이다. 분열과 불안이 숨을 쉬는 한 말이다.
 
탈진실 시대의 가짜뉴스 대처방법
유럽외교협회는 탈진실 시대에, 우리가 진실을 지키면서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대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있다.
 
①가짜뉴스가 발견되는 즉시 이를 시정하도록 하는 규제를 전통 미디어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 기업에도 부과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유럽연합의 규제에 대한 페이스북의 대응은 여전히 미지근하다)
 
②모든 뉴스 생산자의 비즈니스 모델, 특히 재정이 투명해질 때, 우리는 진실을 지킬 수 있다.
 
③뉴스의 질과 책임성을 담보하는 공영 언론이 중요하다.
 
④뉴스와 정보처리에 관한 시민교육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시민들은 뉴스의 저작권, 복수의 출처, 뉴스의 게시 일자, 뉴스의 현실성 등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장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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