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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일의 이코노믹스] 공공성 앞세운 ‘큰 정부’, 민간의 창의 북돋워야 성공

팬데믹과 정부의 역할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코로나19 퇴치가 성공하든 지지부진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것은 큰 정부의 귀환이다. 권위주의 개발시대를 거쳐 산업화·민주화·선진화의 세 이정표를 어느 국가보다도 빨리 달성한 대한민국 아닌가. 그런 우리에게 지금 19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거대 정부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귀환하고 있다.
 

‘성장·분배’ 선택지 밀려나고
국민은 공정·포용·나눔 선호
‘거대 정부’ 할 일 너무 많지만
규제의 장벽 못 넘어서면 실패

시장의 효율이 중시되면서 작을수록 좋았던 정부의 역할이 다시 커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최근 미국식·유럽식 방역체제 모두 실패한 상황에서 한국형 방역체계의 선전은 눈부셨다. 2015년 메르스의 실패를 반복할 수 없다는 의지가 디지털 옷을 입힌 공공성을 탄생시켰다. 한국에서 감염자는 거의 실시간으로 동선 파악이 가능하다. 여기에 검사장비를 신속하게 개발하는 시장의 역동성, 공동체의 헌신과 자발적 참여라는 삼중주가 K방역을 세계의 모범으로 끌어냈다. 한 동료 교수는 “평생 가지고 살았던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 이번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한국의 디지털 추적방식을 비판하던 서구는 이제 한국 벤치마킹에 고심하고 있다. 공공성을 앞세운 거대국가의 진격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코로나19 위기 속에 이제 본격화하고 있는 경제침체 속에 소비자·기업이 아니라 정부만이 유일하게 돈을 풀 준비가 돼 있다. 경제가 더 악화돼 손 쓸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되기 전에, 국가는 얼마든지 돈을 풀어야 한다고 시대정신이 외친다. 결국 정부는 더 비대해진다.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이 가져온 결과다.
 
거대 정부의 귀환은 2010년 반값 등록금으로 시작해 무상급식과 보편적 복지로 퍼져나간 한국 정치 포퓰리즘의 완성이다. 국민이 원하고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인기영합주의적인 표심 잡기라고 눈을 흘길 이유는 없다. 표심의 선택은 우리가 선택한 기본 전제다. 이와 함께 시대정신도 변했다. ‘성장과 분배’라는 선택지는 이제 완벽하게 주변부로 밀려났다. 지난 4·15 총선은 그 결정판이다. 국민은 ‘공정·포용·나눔’을 원한다. 거대정부는 여기에 대한 화답이다.
  
디지털 쓰나미 앞당겨져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대한민국엔 예정된 미래가 있었다. 세계 최고 속도 고령화라는 ‘실버 쓰나미’, 4차 산업혁명으로 통용되는 ‘디지털 쓰나미’가 바로 그것이다. 실버 쓰나미·디지털 쓰나미 모두 한국 사회의 취약한 뇌관을 강타할 예정이었다. 승자의 면면은 바뀌지만,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속성은 변하지 않을 태세였다. 국가가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고 판을 제대로 짜기 전까지는 그랬다. 쓰나미는 밀려오고 있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말의 성찬으로 일관했다. 위원회는 꾸려졌지만 책임 있는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코로나19는 예정된 미래를 앞당겼다. ‘사회적 격리’라는 생소한 단어가 일상화하면서, 새로운 대세로 자리 굳힌 언택트 사회는 우려했던 디지털 소외지대의 그림자를 그대로 노출했다. 부모와 자녀 다 같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일하고 학습해야 하는 이 수상한 시절의 도래는 반지하에서 와이파이 잘 터지는 공간을 찾으려는 영화 기생충의 장면이 누구에게는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 일상화하고 있다. 재난기본소득을 온라인으로 신청할 줄 모르는 어르신들은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주민센터에 들르는 상황이다. IT 강국으로 자부했던 대한민국의 민낯은 이런 것이었나.
 
정부 재정적자 늘어나며

정부 재정적자 늘어나며

시대정신이 불러낸 ‘거대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는 분명하다. 기저질환을 치료하고, 버팀목인 허리를 지키고,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취약한 자영업자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중산층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제조업의 한 날개로만 날아온 체질을 환골탈태해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지만, 근본적 해결책을 시도해 본 기억은 없다. 정치적 결단은 늘 미루어져 왔다.
 
20세기 후반을 추격에만 골몰하던 한국경제가 21세기 제조업 강국이 된 결정적 계기는 1990년대를 관통하던 정보통신 쓰나미의 물결에 제대로 올라탔기 때문이다. 미국의 턱밑까지 쫓아갔던 일본의 전자산업은 미국의  통상압박 앞에 개방과 혁신 대신 수성과 자립을 선택했다. 일본의 추락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기에 한국은 발 빠르게 새판짜기에 성공했다. 정부 독점에서 민간의 창의와 활력을 접목하려는 구조조정을 실행하고, 독점을 허물고 경쟁체제가 도입됐다. 전국 곳곳의 집과 직장, 공공기관을 연결하는 정보의 고속도로가 구축됐다. IT산업이 비약적으로 점프할 수 있는 계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냉전 종식 이후 급물살을 타던 세계화는 한국엔 마음껏 노를 저을 수 있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고통 안 따르는 해법 없어
 
국가채무도 급증

국가채무도 급증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선방하면서 등장한 거대 정부가 산업에 디지털 옷을 입히자는 목표설정은 이런 역사의 연장 선상이다. 그러나 더 깊게 들어가야 한다.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속도를 높여 왔던 세계화에 제동이 걸리는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자강’은 좋지만, 우리만으로 충분하다는 ‘자립’은 틀렸다. 한국에 추월을 허용하고 추락한 일본의 경우를 보자. 세계 주요 2개국(G2)이었던 일본도 세계를 외면하면 그 결과는 추락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IT 고속도로를 깔았지만, 그 고속도로 위를 다양한 차종으로 뒤덮는 데는 실패했다. 이런저런 명분으로 들어선 규제의 장벽을 걷어내지 못하면,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낸 ‘원격의료’는 한시적인 조치로 마감할 운명이다.
 
이번엔 다를 수 있을까. 결국은 정치가 문제이다. 고통이 따르지 않는 해법은 세상에 없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선출제 민주주의에서 고통이 수반되지만 지금 세대와 미래세대의 생존과 행복을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담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현실로 옮기려는 리더십은 당장의 고통을 잊게 하는 마취제를 남용하는 정치에 계속 밀려났다.
 
돈 뿌리는 계획만 있고 민간의 창의·활력,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이번에도 성공궤적은 기약하기 어렵다. 공공성의 위대함을 내세워 공무원만 늘어가고 정부만 비대해지는 그 끝이 궁금하다면, 코로나19의 습격 앞에 유럽 최대의 사상자를 내는 영국의 경우를 보라. 모든 국민에게 무상의료를 제공한다는 선의만으로는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소름 끼치는 결말을 한국이 다시 반복할 이유는 없다.
 
한국 기업의 ‘국내 유턴’ 말처럼 쉽지 않다
중국에 과도하게 집중된 한국의 주력산업들(자동차,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은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을까. 코로나19의 대처과정에서 보여준 중국의 투명성 부족은 중국산에만 의존해 온 중간재의 공급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의 위험을 가중했다. 중국 위험에 취약한 기업들을 본국 귀환(리쇼어링, reshoring)하라는 정치적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리쇼어링이 이루어진다면, 일자리도 생기고 안보도 챙기는 일석이조가 되겠지만, 기업들의 생각은 다르다.
 
리쇼어링으로 치러야 할 비용상승의 압박이 두려운 게 아니라, 중국이 구축한 전후방 생산 클러스터의 탄탄한 기반, 현지투자로 누릴 수 있는 중국시장의 접근성 포기가  쉽지 않다. 파격적인 법인세 인하, 리쇼어링 비용 부담 등 인센티브가 제공돼도 자동화에 저항하는 노조, 고용의 경직성을 고용의 안정성과 동일시하는 노동정책을 극복해야 한다. 정권의 임기보다 더 긴 시간을 내다보는 기업들은 리쇼어링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위험에 노출됐는데 못 본 체하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다. “기업이 알아서 한다”는 것은 무능의 또 다른 표현이다. 어떤 방책이 있을까. 쾌도난마 식의 한가지 방식을 들이대는 것이 아닌 분야별 맞춤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적인 산업의 경우, 중국 아닌 신뢰할 수 있는 국가로의 조용하고 지속적인 이전이다. 당장의 이전이 어려운 경우,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폭의 여유분을 이들 국가에 구축하는 것이 첩경이다. 외교통상부가 아닌 산업통상자원부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정부가 풀어야 할 코로나19시대 산업통상정책이다. 이걸 문제라고 파악은 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해진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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