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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승에 취했던 민자당·열린우리당 몰락, 그 시작은 내부총질

179석 진보 여당의 시대가 시작된다
수식어는 압도적, 전례없는, 역대급, 초유의, 기록적 같은 말들이었고, 꾸밈을 받는 말은 강한 정부, 초거여(超巨與), 슈퍼여당 등이었다. 179석(180석 당선됐지만 양정숙 의원 제명) 여당을 탄생시킨 4·15 총선 이튿날, 여러 언론이 뽑은 헤드라인 얘기다.
 
이달 말이면 20대 국회가 끝나고 21대 국회가 시작된다. 더불어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으로 분산됐던 20대 국회와 여당 179석, 제1야당 103석인 21대 국회는 분명 다를 테다. “개헌 빼고 다 할 수 있다”거나 “주요 법안과 예산안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다” 같은 설명이 있지만, 임기 4년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 어렵다.
 
이럴 때 참고할 만한 게 앞선 경험, 즉 역사다. 민주당을 규정하는 ‘179석의 진보 여당’과 꼭 닮은 경우는 없다. 하지만 179석이란 숫자는 218석을 가졌던 1990년의 민주자유당과, ‘과반의 진보 여당’이란 정체성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152석의 열린우리당과 견줘볼 수 있다.
 
두 선례(先例)엔 공통점이 있었다. 협상보다 숫자의 힘에 기댔고, 귀를 닫은 채 밀어붙였으며, 종국엔 분열했다. 총선 승리 일성으로 “열린우리당을 반면교사해야 한다”던 이해찬 대표의 말마따나, 다수파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2007년 2월 6일 오전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김한길 열린우리당 전 원내대표, 강봉균 정책위의장을 비롯한 23명의 의원들이 탈당기자회견을 마친뒤 기자실을 나서고 있다. [중앙포토]

2007년 2월 6일 오전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김한길 열린우리당 전 원내대표, 강봉균 정책위의장을 비롯한 23명의 의원들이 탈당기자회견을 마친뒤 기자실을 나서고 있다. [중앙포토]

‘여권, 세력 분열 이어 이념 분열로’
2007년 2월 20일 중앙일보 8면에 실린 기사 제목입니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152석을 차지하며 승리했던 열린우리당이 결국 쪼개진다는 내용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은 거대 여당이 됐지만 3년 만에 사분오열합니다.
 
거여(巨與)는 분열하기 일쑤였습니다. 분열은 곧 몰락으로 이어졌고요. 열린우리당과 1990년대의 민주자유당이 이를 상징합니다.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과반(153석)을 했던 한나라당도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으로 나뉘어 싸움박질하다 사분오열했으니, 거여의 분열은 필연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열린우리당은 그 중에서도 유독 드라마틱했습니다.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한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 당에선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초선 군기 잡겠다고 하면 그 사람을 물어뜯어버리겠다.”

 
육군 중령 출신인 임종인 당시 당선인이 초선 당선인 모임에서 한 농담 섞인 발언이었는데요.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이 몰락하는 원인이 됐던 당 내 분열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발언이 됐습니다.
 
2007년 2월 20일 중앙일보 기사

2007년 2월 20일 중앙일보 기사

17대 국회가 시작하자마자 열린우리당 내 초선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중진 그룹과의 갈등이 본격화됐습니다. 당시 86그룹의 일원으로 당선된 초선이었고 지금은 4선 중진이 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렇게 기억합니다.
 

“일부 의원들이 선명성 경쟁을 했습니다. 자신이 더 개혁적이라면서요. 그때처럼 초선들이 앞다투어 기자회견장을 찾아 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한 적은 없을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에선 초선 108명이 대거 배지를 달았습니다. 이들의 좌충우돌을 두고 ‘탄돌이’라거나 ‘108 번뇌’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갈등의 뇌관은 국가보안법이었습니다. 중진 의원들은 야당과의 타협을 염두에 두고 '독소 조항 삭제'라는 현실론을 주장했지만, 초선들은 국보법 완전 폐지라는 강경론을 주장했죠. 당내 이견은 끝내 조율되지 못했고, 결국 국보법 개정도 실패했습니다. 책임론은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이부영 전 의원의 회고입니다. 
 

“초선들은 중진들을 배신자라 욕했고, 중진들은 초선들이 청와대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생각해 침묵했습니다. 당은 분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 2월 19일 중앙일보 3면

1990년 2월 19일 중앙일보 3면

앞서 거대 여당 분열의 역사는 민주자유당(민자당)에서 시작됐습니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통해 217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수로 출발한 민자당은 시작부터 삐걱거렸습니다. 민자당 출범 10일 뒤인 그해 2월 19일 중앙일보 3면엔 ‘한지붕 세 가족 아랫목 다툼’이란 소제목이 붙은 기사가 실립니다. 성격이 다른 3개 정당이 모인 민자당을 당시 인기 드라마 제목에 비유한 건데, 당이 출범하자마자 당직이라는 ‘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민자당의 분열은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같은 이들이 모여 만든 단체가 곧 정당일진대, 민자당은 정치 이념·노선과 관계없이 거물 정치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급조된 당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정의당 총재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안정을 위해 야당의 협조가 필요했고, 김영삼(YS) 통일민주당, 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전 총재는 차기 대권 후보로서 기반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활동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회고입니다.
 

“합당 자체가 화학적인 합당이 아니고 물리적인 합당이었습니다. 합당이라기보다는 연합 세력을 만든 것이었죠. 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린우리당 전·현직 지도부가 2007년 1월 7일 서울 서교동의 한 음식점에서 오찬 회동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왼쪽부터 김한길 원내대표, 정동영 전 의장, 정세균 전 산자부 장관,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김근태 의장, 김혁규 의원.[중앙포토]

열린우리당 전·현직 지도부가 2007년 1월 7일 서울 서교동의 한 음식점에서 오찬 회동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왼쪽부터 김한길 원내대표, 정동영 전 의장, 정세균 전 산자부 장관,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김근태 의장, 김혁규 의원.[중앙포토]

2007년 1월 25일 중앙일보 6면에 실린 열린우리당 계파 그래픽 기사

2007년 1월 25일 중앙일보 6면에 실린 열린우리당 계파 그래픽 기사

이런저런 이유로 삐걱대던 거대 여당은 '선거 패배'라는 결정타를 맞으면 곧바로 사분오열합니다. 2004년 총선 승리는 열린우리당의 처음이자 마지막 승전보입니다. 열린우리당이라는 이름으로 치른 2007년 재보궐 선거까지 8번의 선거에서 내리 졌는데요, 특히 2006년 지방선거에선 16개 광역자치단체장 중 2석만 겨우 건지는 몰락도 겪었습니다.
 
연이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노 전 대통령에게로 돌리는 이들이 나왔습니다. 당내 분열 전선이 초선 대 중진에서 '친노(친노무현) 대 비노(비노무현)'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죠. “대통령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정장선 전 의원), “대통령이 신이냐”(문학진 전 의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계파 싸움도 시작됐습니다.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장영달 전 의원은 이렇게 전합니다.
 

“다음 대권을 내다보는 당 지도부 인사는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하려고 애썼죠. 그러다 보니 당내 의원 수는 많았지만, 계보 간 화합이 안 됐고, 그러면서 분열은 가속됐습니다.”

 
김종필 전 민자당 대표(왼쪽)가 주도하는 신당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2월 21일 앰배서더호텔에서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다. [중앙포토]

김종필 전 민자당 대표(왼쪽)가 주도하는 신당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2월 21일 앰배서더호텔에서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다. [중앙포토]

1995년 12월 5일 민자당은 고위당직자회의에서 새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이날중으로 중앙당 및 지방당사에 부착되어있는 현 당명이 적혀있는 모든 현판 당기물등을 철거했다. [중앙포토]

1995년 12월 5일 민자당은 고위당직자회의에서 새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이날중으로 중앙당 및 지방당사에 부착되어있는 현 당명이 적혀있는 모든 현판 당기물등을 철거했다. [중앙포토]

민자당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149석)한 뒤부터 갈등이 표면화됩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이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이 됐지만, 목표를 달성한 YS와 목표 달성에 실패한 JP 간에 ‘어색한 동거’를 이어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듬해 1월, 당 대표를 맡고 있던 JP는 YS로부터 퇴진 종용을 받고 대표직에서 물러납니다. JP 쪽 인사들도 대거 탈당해 2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합니다.
 
민자당 탈당과 자민련 창당의 예에서 보듯 탈당은 거여 분열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열린우리당에선 2007년 1월 임종인 전 의원 탈당을 시작으로 계파별 탈당 러시가 이어졌습니다. 그해 6월엔 당을 구성하는 두 축인 정동영ㆍ김근태 전 의장이 모두 탈당했죠. 결국 열린우리당은 탈당파들이 만든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됐고, 창당 39개월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가 지난달 15일 선거사무소 상황실에서 21대 국회의원선거 당선을 확정한 뒤 부인 김숙희 여사와 꽃다발을 들고 있다. [뉴스1]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가 지난달 15일 선거사무소 상황실에서 21대 국회의원선거 당선을 확정한 뒤 부인 김숙희 여사와 꽃다발을 들고 있다. [뉴스1]

179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수를 갖게 된 더불어민주당의 고민 중 하나도 분열입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17일 당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열린우리당의 아픔을 반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분열의 결과를 가장 잘 아는 이가 이 대표입니다. 그는 1988년 13대 국회부터 7선을 하며 민자당, 열린우리당의 역사를 봐왔기 때문이죠. 이 대표는 21대 총선 당선인에게 보낸 축하 편지에선 “(열린우리당 시절) 우리는 승리에 취했고 과반을 과신해 겸손하지 못했다”고 반성했습니다.
 
그 반성이 역사의 반복을 막을까요? 당내에선 아직까진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열린우리당 초선이던 우상호 민주당 의원의 말입니다. 
 

“총선 승리 뒤 한 달 정도 지나면 당에서 실수가 몇 개 나오는데 지금은 안 나오고 있잖아요. 초선도 잘 따라주고 있고, 재선 이상은 이미 질서가 생겼습니다. 열린우리당 때와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민주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확 넓어진 측면은 기회이자 위험 요소일 수 있습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86그룹, 관료 그룹 등 민주당 의원의 구성이 다양해지면서 이념적 스펙트럼도 넓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다양한 주장이 나오면서 충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진단합니다. 민주당이 유념해야 할 부분입니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 안상수 원내대표, 정몽준 후보(앞줄 왼쪽부터) 등 지도부가 2008년 4월 9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총선 출마자 당선 예측 방송을 시청하며 웃고 있다. [중앙포토]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 안상수 원내대표, 정몽준 후보(앞줄 왼쪽부터) 등 지도부가 2008년 4월 9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총선 출마자 당선 예측 방송을 시청하며 웃고 있다. [중앙포토]

거여에 맞선 소수당의 전략은
한나라당은 2004년 총선에서 121석만 얻으며 패했던 한나라당은 그로부터 4년 뒤 총선에서 153석을 차지하며 다시 제 1당 자리에 오릅니다. 2007년 대선에선 대통령도 배출하고요. 연이은 선거 승리가 단지 열린우리당과 진보 진영의 분열 때문이었을까요?
 
당시 선거 과정과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은 나름대로 전략이 있었습니다.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 ‘뉴타운 개발’ 공약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공약이었냐면, 통합민주당 후보들마저 비슷한 공약을 뒤이어 들고 나올 정도였죠. 결국 먼저 공약을 발표한 한나라당은 서울지역 48개 지역구 가운데 40곳을 싹쓸이했습니다. 절반이 넘는 23곳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뉴타운 조기 착공이나 추가 지정ㆍ확대를 공약했었습니다.
 
선거 결과를 두고 “‘욕망의 정치’가 전면으로 부상했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권자의 40% 정도로 추산되던 중도층의 욕망을 한나라당이 뉴타운 공약으로 자극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표를 가져온 것은 분명합니다. 뉴타운과 함께 나왔던 수도권 규제 완화, 특목고 같은 공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보수의 ‘욕망 정치’가 진보의 ‘계몽’을 압도했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민주자유당의 3당 합당 7년 뒤인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것도 결국 중도층을 흡수한 결과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레드 콤플렉스’(공산주의와 진보를 향한 반감)의 피해자였습니다. 보수 쪽에 무게가 실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한국 사회에서 김 전 대통령은 레드 콤플렉스에 막혀 번번이 패배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한국 사회의 중도층의 마음을 갖고 왔던 방법은 이념적 지침(指針)을 오른쪽으로 살짝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가 『한국 진보세력 연구』의 기록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김대중은 이때 ‘중도보수’를 표방해서 난데없는 ‘위장보수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김대중이 1995년 8월의 새정치국민회의 발기인대회에서 신당의 이념을 ‘중도보수’라고 밝힌 데서 비롯되었다.”
 
권호ㆍ윤성민ㆍ하준호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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