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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한 여자

이혁진 소설가

이혁진 소설가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다른 삶으로 도망친 여자 이야기다.  
 

유대교 공동체에서 도망쳐와
베를린에서 새 삶 사는 여인
뻔하지만 눈 떼기 어려운 이유
그 속에서 ‘한국’ 보이기 때문

하시디즘을 따르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자라고 결혼까지 한 여자가 황급히 베를린으로 떠난다. 여자는 독일어를 못한다. 하시디즘 공동체가 여자들에게는 교육과 사회생활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학력도 없고 경력도 없다. 여자에게 베를린은 극장 같은 곳이다. 삶이 있지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삶은 없는 곳. 친모가 떠나기 전 반드시 간직하라고 쥐어 준, 독일국적자가 될 수 있는 증명서류도 극장표에 불과하다.
 
다만 여자는 무척 운이 좋다. 도착하자마자 음악원에 다니는, 자기 또래의 친절하고 재능있는 친구들을 만나 즐겁고 상징적인 시간을 보낸다. 음악원에서 몰래 자고 나온 여자를 본 교수는 신고하는 대신 아침을 사준다. 장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해 볼 것을 권하고 수업도 참관할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을 버린 줄 알았던 친모마저도 실은 버린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에 빼앗긴 것이라고, 여자와 태어날 아이를 위해 물심양면 지원하겠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내내 쉽게 풀려나간다.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보낸, 추격자와 여자의 남편이 만드는 긴장도 강력하거나 치명적이지는 않다. 얼마 보지 않아도 결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자는 시험에 합격할 것이고 장학생이 돼 베를린에 남을 것이다. 다른 삶으로 도망치는 현실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그러니 이것이 드라마라는 것 말고, 설사 실화에 기초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여자의 미래, 이야기의 결말을 기어이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자가 도망쳐 나온 하시디즘 공동체 때문이다. 하시디즘 공동체의 외양은 기괴해 보인다. 남자들은 옆머리를 길게 길러 눈썹 옆으로 늘어뜨린다. 예배나 모임에서는 커다란 마시멜로 같은 털모자를 쓴다. 결혼한 여자들은 모두 삭발해 항상 스카프나 가발을 쓰고 있다. 살갗을 감추기 위해 긴 옷을 입는다. 하지만 한 걸음 들어가면 부러워할 만한 질서와 일치, 번영이 있다.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난제는 권위 있는 랍비가 지혜로운 탈무드에 따라 해결책을 주고, 모두 일사불란하게 그것을 따른다. 결혼·출산·장례처럼 개인에게 크고 버거운 일들은 공동체 전체가 나서서 함께 축하하거나 애도한다. 경제적으로도 강력히 연계하고 결속해 있어 모든 구성원이 평균 이상의 안정적 생활을 누린다. 그 바탕 위에서 남자들은 가장으로서 근면히 일하고 공무에 참여한다. 여자들은 가사를 돌보고 출산과 육아를 담당한다. 요컨대 다소 기괴한 습속과 규율을 따르기만 한다면 공동체에서의 삶은 안락하고 온정이 넘친다(익숙한 것이기도 한데 한 꺼풀 외양만 벗기면 근대 한국의 이상향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악으로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기괴함은 익숙함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 보상으로 오는 안락과 온정, 그 안정감과 행복은 모든 삶의 범박하되 소중한 목표다. 이것을 악으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떠올려야 한다. 가장 악랄한 노예주는 노예를 학대하는 자가 아니라 노예에게 온정을 베푸는 자다. 노예제를 유지시키는 사람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기 때문이다.
 
여자를 찾아내 납치한 추격자는 여자에게 총을 겨누는 대신 건넨다. 결국 여자 자신이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공동체에서 자라고 길든 자신들은 이미 그 밖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매 상황 절감하는 여자에게는 끔찍한 협박이다. 반면 남편은 진심을 다해 여자에게 말한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이제 어떤 것도 두 사람 관계에 개입하도록 방관하지 않겠다고, 그 누구보다 여자의 편에서 여자를 지키고 아낄테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다시 돌아가자고 회유한다. 공동체의 상징이자 남자로서 긍지인 길게 늘어뜨린 옆머리를 잘라버리기까지 하지만 남편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더 악랄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는 남편에게 말한다. “늦었어, 너무 늦었어.”
 
여자는 선택한다. 추격자의 협박도 남편의 회유도 아닌 자신과 아이를 위한 자신의 선택. 그 선택이란 여자가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어떤 안정과 행복에서도 없는 것, 도망쳐 온 베를린에서만 찾아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만 가득한, 극장 같은 베를린에서 비로소 여자도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그 삶이 아름답게 완성될지, 완성되기는 할지 여자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여자는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더는 도망친 사람이 아니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혁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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