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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사신은 논한다”권력에 맞선 사관의 서릿발 논평

기자
이향우 사진 이향우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16)

 
1401년 11월부터 1418년 8월의 태종 재위기간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태종실록』은 1424년(세종 6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황희·맹사성·윤회·신색 등에 의해 1431년 완성되었다. 그 후 정도전과 박포의 난에 관한 기사의 착오로 1442년에 개수되었다.
 
세종은 부왕 태종의 즉위 과정과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여러 무리수가 마음에 걸렸을 수도 있었겠다. 그런 연유로 세종은 완성된 『태종실록』을 보려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 사실이 『세종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 또한 놀라울 뿐이다. 이를 통해 조선왕조실록 편찬의 독립성이 증명됐다고 할 수 있다.
 
세종. 조선전기 제4대(재위:1418~1450) 왕. [사진 Pixabay]

세종. 조선전기 제4대(재위:1418~1450) 왕. [사진 Pixabay]

 
세종 20년(1438 무오) 3월 2일 4번째기사
임금이 『태종실록』을 보려 했으나 신하들이 반대하다
임금이 도승지 신인손에게 이르기를,
옛날 우리 태종께서 『태조실록』을 보고자 하니, 변계량(卞季良) 등이 이르기를 “『태조실록』은 편수(編修)하기를 매우 잘하여 사실을 모두 바르게 썼는데, 이제 전하께서 나아가 보신 뒤에 내려 주신다면, 후세 사람들은 모두 믿지 못할 사기라 하여 도리어 의심할 것입니다” 하므로 태종께서 보시지 못하였다. 나는 또 “자손으로서 조종의 사업을 알지 못하면 장차 무엇으로 감계(鑑戒)할 것인가” 하고, 『태조실록』을 보고자 하여 여러 신하에게 상의하였더니, 유정현(柳廷顯) 등이 “조종이 정해 놓은 법에 의거하여 조종의 사업을 잘 계술(繼述)하는 것이 실상은 아름다운 뜻이 된다” 하므로, 이에 볼 수 있었다. 지금 또 생각하니, 만약 당시의 사기가 아니면 조종이 정한 법을 보는 데에 있어 조와 종에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이미 『태조실록』을 보았으니 『태종실록』도 또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니 여러 겸춘추(兼春秋)에게 상의하라”
하였더니, 대신 황희·신개 등이 모두 말하기를
“역대 임금으로서 비록 조종의 실록을 본 사람이 있더라도 본받을 것은 아닌가 합니다. 당 태종이 사기를 보고자 하니 저수량과 주자사(朱子奢) 등이 ‘폐하께서 혼자서 본다면 일에 손실이 없지마는 만약 사기를 보는 이 법이 자손에게 전해지게 되면 후세에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短點)을 장점으로 두호(斗護)하여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뜻에 순응하여 제몸을 완전하게 하려 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니, 천년 후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하였으니, 신 등의 논의는 바로 이 말과 같습니다. 이 두 신하는 모두 명신이라고 이름난 사람이니 그의 말은 반드시 본 바가 있을 것이고, 또 태종의 일은 전하께서 친히 보신 바이니 만약 태종의 일을 본으로 삼아 경계하고자 한다면 역대 사기가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지금의 실록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하물며 조종의 사기는 비록 당대는 아니나 편수한 신하는 지금도 모두 있는데,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반드시 편하지 못할 것이며 신 등도 또한 타당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하니, 임금은 마침내 보지 아니하였다.
 
사론은 오늘날 논설
사론(史論)은 사관이나 실록 편찬관이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쓴 주관적인 논평(論評)이다. 실록에는 사관의 개인 생각을 적은 논조가 자주 등장하는데 글은 서두에 사신왈(史臣曰), 즉 ‘사신은 논한다’로 시작하고 있다. 임금뿐만 아니라 고위관료들 또한 그 언행이 후대에 사관의 붓 끝에 기사화될 때에는 결코 자유롭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래 중종실록 총서에서 사관은 중종의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성품으로 인해 일어난 여러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상(임금)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진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를 내치고 박빈(朴嬪)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가 어그러졌고 ,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1608년 2월부터 1632년 3월까지 광해군 재위기간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인조 2년(1624)에 편찬했다. 역대왕의 기록을 실록이라 하는데 연산군과 광해군의 기록은 왕위에서 쫓겨난 왕을 군으로 강등해 일기(日記)로 칭하고 있다.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사신의 논조는 사뭇 준엄하게 왕의 사치를 꾸짖는다.
 
조선후기 제15대 왕 광해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사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후기 제15대 왕 광해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사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광해군일기 중초본 116권, 광해 9년(1617년) 6월 27일 3번째 기사
영건 도감이 청기와를 만드는데 필요한 염초의 구입을 청하다
영건 도감이 아뢰기 “일찍이 성상의 분부로 인하여 청기와 30눌(訥)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안에서 내려준 염초(焰硝) 2백 근을 쓰는 외에, 부족한 숫자는 무역해 오면 자연 이를 옮겨 써서 구워낼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이외에 또 때때로 계속해 구워내고자 하면 미리 마련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성상의 분부대로 도감에 있는 은(銀)을 동지사(冬至使)편에 보내어서 그로 하여금 사오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청기와를 구워내는 데 필요해서 무역해 오는 물품은 넉넉하게 사오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제대로 이지도 않은 띠풀집과 세 층의 계단을 흙으로 쌓은 집에 거처하였는데도, 아주 먼 옛날부터 다스림에 대해 말할 때면 반드시 요순(堯舜)을 칭한다. 그리고 하대(夏代) 말기로 내려와 곤오(昆吾)가 기와를 구운 것에 대해서 검소한 덕을 숭상하는 임금이 이미 사치스럽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 반드시 만리 바깥에서 회회청(回回靑)을 사와서 정전(正殿)의 기와를 문채 나게 한 다음에야 서울을 우뚝하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지금 적당한 시기가 아닌데 크게 토목공사를 벌려서 국가의 재정이 탕갈되었는데 이겠는가. 그런데도 도감을 맡고 있는 자들은 매번 사치스럽고 크게 하기 만을 일삼으면서 일찍이 한 사람도 한 마디 말을 하여 폐단에 대해 진달해서 만분의 일이나마 폐단을 구제하지 않으니 애석하도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은 당대 왕의 행적과 정치현안뿐 아니라 국제정세까지 담고 있는 백과사전적인 역사서다. 이 기록물은 조선왕조의 500년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역사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전 세계인이 열람하고 읽을 수 있는 기록유산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기록물이 디지털화 해 기록 보관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현 시국을 더 현명하게 판단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지혜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중국과 왜와의 역학적인 정치 현안은 현재에도 우리나라의 이웃인 미국, 중국, 일본과 함께 현재진행형이다. 당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마음의 붓끝으로 써내려간 옛 선조의 기록유산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의 자긍심이다. 뉴스를 읽을 때마다 혼돈의 논조가 난무하는 지금 우리는 왕의 심기를 눈치 보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고 권력에 굽신 대지 않았던 서릿발 같이 매서운 사관의 논평이 그리운 때이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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