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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급조된 단어 ‘미술’ 어떻게 내적 언어로 뿌리내렸나

바우하우스 이야기 〈34〉

“아, 그게 뭐였지?”
 

메이지 정부의 빈 박람회 출품작
독일 번역책임자가 새 단어 만들어

‘모른다는 걸 안다’ 메타인지 작동
새로운 상황에 적합 예술개념 필요
‘자기중심적 언어’서 ‘내적 언어’로

요즘 이 문장을 아주 입에 달고 산다. 사람 이름이나 어떤 단어가 입 안에서만 빙빙 돌뿐 생각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친구들 모임에서 한 명이 이러기 시작하면 다같이 인상 쓰면서 기억해내려 애쓴다. ‘설단현상(Tip-of-the-tongue-Phenomenon)’이다.
 
그러나 IT세상이다. 휴대폰으로 ‘연관검색어’를 검색하면 바로 기억해낼 수 있다. ‘연관검색어’로 검색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메타인지’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이지만 이를 설명하거나 지칭할 수 있는 개념이 없을 때도 ‘메타인지’가 활성화된다. 아예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술(美術)’이라는 개념이 바로 그랬다.
 
‘미술’은 아주 급조된 단어였다. 1873년 일본이 빈 만국박람회에 출품을 준비할 때였다. 빈 만국박람회는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메이지 정부가 공식적으로 처음 참여하는 국제적 행사였다.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일본 제품이 처음 소개된 후, 유럽에는 후에 ‘자포니즘(Japonism)’이라 불리게 될 ‘일본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독일인 고트프리트 바게너(Gottfried Wagener)를 초청하여 만국박람회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빈 박람회 사무국에서 보내온 전시물품에 관한 공식 분류표에 번역할 수 없는 단어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Darstellung der Wirksamkeit der Kunstgewerbe-Museen’라는 항목이었다. ‘공예박물관의 기능에 관한 전시’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당시 메이지 정부 번역담당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위에서 ‘공예’라고 번역한 ‘Kunstgewerbe’에 해당하는 일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1873년 빈 만국박람회 일본관. ‘미술’이란 단어는 일본이 빈만국박람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급조된 단어였다.

1873년 빈 만국박람회 일본관. ‘미술’이란 단어는 일본이 빈만국박람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급조된 단어였다.

그들은 아주 급하게 이에 해당하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다. ‘미술(美術)’이다. 아름다움의 ‘미(美)’와 기술이나 수단, 방법을 뜻하는 ‘술(術)’을 이어붙인 것이다. 번역은 아주 그럴듯했다. 위의 독일어 항목은 이렇게 번역되었다. ‘美術〈西洋ニテ音楽 画学 像ヲ作ル術 詩学等ヲ美術ト云フ〉ノ博覧場ムゼウムヲ工作ノ為ニ用フル事’. ‘미술(서양에서는 음악, 그림, 조각상의 제작기술, 시학 등을 미술이라 한다)의 박람장을 공작을 위해 이용하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
 
번역책임자는 ‘미술’이라는 새 단어를 만들어놓고 자신이 없었던지, 주석 형식의 부연설명까지 달았다. 이렇게 동양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미술’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미술’은 ‘예술’ ‘공예’ 등의 개념과 주도권 다툼을 거쳐 자신만의 독특한 기호학적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미술’ 개념이 동아시아문화권에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은 ‘메타인지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주 흥미롭다. 이 맥락에서 ‘메타인지’의 성립과정에 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메타인지’는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이다. 일단 ‘메타인지’라는 화두를 꺼낸 심리학의 설명방식을 살펴보자. 발달심리학에는 메타인지의 대표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자기성찰’ 능력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관해 흥미로운 논쟁이 있다. 이른바 ‘자기중심적 언어(egocentric speech)’현상에 관한 피아제(Jean Piaget·1896~1980)와 비고츠키(Lev Semenovich Vygotsky·1896~1934) 사이의 논쟁이다.
 
자기중심적 언어 vs 내적 언어
 
비고츠키

비고츠키

아, 논쟁이라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다. 비고츠키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피아제가 자신을 비판한 이 동갑내기의 논문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피아제는 비고츠키의 비판에 ‘오해’라며 반박했지만 비고츠키의 재반박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었더라도 둘의 논쟁은 결말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과학적 논증의 문제가 아닌 세계관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언어’를 처음 주목한 이는 피아제였다. 아이들이 ‘혼자 중얼거리는 현상’을 피아제는 ‘자기중심적 언어’라 칭했다. 주로 2세~7세까지의 ‘전조작기 단계’의 아동들에게서 나타나는 이 현상을 피아제는 아동의 인지능력이 채 발달하지 못해 자기중심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미성숙의 산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비고츠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기중심적 언어’를 타인과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내면화되어 ‘내적 언어(inner speech)’가 되어가는 과정의 중간단계라고 봤다. ‘내적 언어’란 ‘생각’과 ‘언어’가 통합된 ‘언어적 사고(verbal thinking)’를 의미한다. 이렇게 하면, 내가 인식의 주체이며 동시에 인식의 객체가 되는 메타인지로서의 ‘자기성찰’이란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내면화된 결과로 설명이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타인’과 ‘나’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내면화되어 ‘나(1번)’와 ‘나(2번)’사이의 상호작용이 ‘자기성찰’이라는 이야기다. 피아제는 ‘자기중심적 언어’를 아동이 사회적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연습단계 정도로 설명한 반면에 비고츠키는 정반대의 발달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피아제

피아제

인간의 모든 고등정신과정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비고츠키의 주장은 ‘조절’과 ‘동화’라는 생물학적 메타포로 발달과정을 애매하게 설명하는 피아제의 이론에 비해 설명의 폭이 훨씬 더 넓다. 최근에 등장한 ‘메타인지’의 발달과정까지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언어’는 아동에게서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다. 성인도 자주 혼자 중얼거린다. 복잡한 문제가 있거나, 화가 날 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나(1번)’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나(2번)’를 동원하는 것이다. ‘나(2번)’는 성장과정에서 함께 상호작용했던 부모나 형, 누나, 혹은 보다 영리했던 친구가 내면화된 결과다. 비고츠키 방식으로 설명해야 ‘문화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인지발달의 궁극적 목표로 ‘논리적 정합성’만을 주장하는 피아제의 경우, ‘문화적 차이’는 극복되어야 할 인지적 오류일 뿐이다.
 
낯선 세계와의 상호 작용
 
메타인지는 각 개인의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해당 언어공동체에서도 끊임없이 작동한다. 오늘날 이를 ‘집단지성’이라 일컫는다.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산업계몽주의야말로 집단적 메타인지의 대표적 사례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자기성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메이지시대의 번역책임자도 ‘Kunstgewerbe’라는 낯선 독일어 단어가 지칭하고 있는 현상이 어떤 것인지는 알았다. 아울러 이에 대응하는 단어가 일본에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당시 일본문화에서 동원 가능한 개념들을 편집해서 ‘미술’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메타인지가 동원된 것이다. ‘편집가능성(Editability)’을 알아채는 것 또한 메타인지의 주요기능 중 하나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술’이라는 개념은 당시로서는 낯선 서구 모더니티와의 상호작용과정에서 생겨난 ‘자기중심적 언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술은 해당 언어공동체에서 아주 중요한 ‘내적 언어’로 뿌리내렸다. 이를 토대로 수없이 많은 제도가 생겨났고, 전혀 다른 차원의 내적, 외적 활동이 가능해졌다. 동네마다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미술학원’ 간판을 보라. 150여 년 전 일본 메이지 시대의 번역책임자의 ‘중얼거림’이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 말이다.
 
‘메타인지’를 활성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낯선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끝없이 새로운 것을 공부해야 하는 거다. 내 연재가 어렵다는 불평이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참고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맨날 아는 이야기만 듣고 또 들으며 ‘확증편향’만 공고히 하면, 완전 망한다. 불편하더라도 자주 다른 이야기, 낯선 이야기를 들어야 메타인지가 활성화된다. 그래야 세상 돌아가는 양상이 제대로 이해된다.
 
미술·예술·공예와 같은 개념이 혼란스러웠던 것은 메이지 시대 번역책임자만이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종교·왕·귀족을 위한 예술이 부르주아·시민·노동자를 위한 예술로 자리 잡아가던 18세기 이후,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예술개념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제체시온에서 바우하우스로 이어지는 예술개념의 변화는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작동한 ‘메타인지’의 산물이다. 다시 바우하우스 성립 초기 독일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후죽순 생겨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제체시온’에 속한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미술양식은 ‘유겐트슈틸(Jugendstil)’이라 불린다. ‘유겐트(Jugend)’는 ‘젊음’, ‘청춘’을 뜻하고, ‘슈틸(Stil)’은 ‘스타일’ 즉 ‘양식’을 뜻하는 독일어다. 한마디로 ‘영한 스타일’이란 거다. 프랑스의 ‘아르누보(Art Nouveau)’를 독일식으로 수용한 결과다. 아르누보는 말 그대로 ‘새로운 예술’을 뜻한다. 도대체 그 이전의 예술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었기에 ‘새로운 예술’이라고 불렀을까?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 자유대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 『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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