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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시선] 보수를 버려야 보수가 산다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문재인 정권이 야당 복 하나는 천복을 타고났다’는 속설은 공식이 됐다. 21대 총선도 결국 미래통합당의 참패로 끝났다. 180석 대 103석. 궤멸 수준이다. 주권자들은 반성과 변화를 보이지 않는 통합당에 4연속 선거 참패란 참담한 성적표를 안겼다.
 

선거용 가짜 보수와 결별하고
공동체 위한 포용적 대안 절실
보수→실용·미래가치 앞세워야

코로나 탓할 게 아니다.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고 변화의 물결을 거스르며 역주행을 거듭해온 대가다. 지난 4년여, 통합당의 모습을 복기해보자. 입만 열면 ‘보수’ 타령이었다. 인명진 비대위가 가장 먼저 한 일도 당헌 당규에서 사라졌던 ‘보수’라는 용어를 되살린 것이었다. 박근혜 정권 출범의 견인차가 됐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은 폐기됐고, 자유 시장경제와 자유 통일을 다시 전면에 내걸었다. 간판도 자유한국당으로 바꿨다.
 
홍준표 체제는 한술 더 떴다. 대중의 감수성과 동떨어진 천박한 시대인식을 드러내며 품격 잃은 막말로 보수를 희화화했다. “뇌물 먹고 자살한 사람” 같은 선동이 보수층을 결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겠지만, 결과는 보수의 텃밭이던 PK(부산시장·경남지사)마저 민주당에 내주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2018년 지방선거에서 통합당이 당선된 곳은 대구시장·경북도지사뿐이다)
 
황교안 체제는 애당초 확장성의 한계를 잉태하고 있었다. 탄핵과 선거 패배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원인 분석이 있었다면 박근혜 정부의 법무장관·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인물을 간판으로 내세울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통합당은 탄핵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징적 인물을 ‘보수의 아이콘’으로 둔갑시켰다. 삭발한 머리에 붉은 띠 두른 강경투사의 이미지가 투영될 때마다 국민들 뇌리엔 탄핵의 기억이 더욱 또렷하게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통합당은 무조건 싫다’는 비호감도가 60%나 나오는 것 아닌가. 애지중지해온 ‘보수’는 ‘주홍글씨’가 됐다.
 
“지키기 위해 개혁한다”(에드먼드 버크)는 말은 보수가 계승해야 할 정신의 요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걸 핵심 가치이자 미덕으로 삼는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공동체의 안전과 이익이 붕괴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혁신하는 게 진짜 보수다. 자유가 주는 거대한 힘이 사회와 국가발전의 토대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만 열면 ‘보수’를 외쳐온 통합당은 자신의 이익에 민감하고 공동체를 지키는 데는 둔감했다. 코로나 사태속 치러진 선거에서 코로나 국난 극복이란 의제를 외면하고 정파적 이익을 앞세운 정권 심판만을 부각했다. 성장만 강조했지 성장의 과실이 공동체에 고루 퍼지도록 하는 분배 문제에 침묵했다. 소외되고 낙오된 약자를 위한 포용적 대안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냉전적 사고에 빠져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보수는 기득권과 가진 자의 대변자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제 가짜 보수, 선거용 보수와 결별해야 할 때다. 통합당은 4·15 총선으로 ‘영남+강남당’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민주당 지지율이 신장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남3구의 민주당 의석수는 줄었지만 득표율(43.6%)은 20대 총선(40.7%)때보다 2.9%포인트 높아졌다. 영남에서 범진보 진영의 의석수(7명)는 절반으로 줄었지만, 민주당의 득표율은 모두 올랐다. 부산은 37.8%→43.5%, 경남 29.8%→37.1%, 대구도 24.4%→28.5%로 높아졌다. “딱 4월 15일까지만 통합당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던 대구 시민의 말이 엄포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보수를 대체할 키워드는 ‘실용’과 ‘미래’가 돼야 할 것이다. 4차산업 혁명이 초래한 초지능·초연결 시대에 불어닥친 코로나 효과로 세상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신천지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생산과 소비패턴의 변화,AI가 바꿔놓을 노동·교육 현장, 정부와 국가의 역할 변화를 진보-보수의 프레임으론 감당할 수 없다. 더더욱 기득권 보수가 차지할 자리는 없다.
 
한가지 희망은 민주화 이후 작동해온 민심의 균형추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는 점이다.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 득표율은 민주당 49.9%, 통합당은 41.5%였다. 2017년 대선 때 범 진보득표율(47.3%)과 이번 비례대표의 범 진보득표율(48.19%), 그리고 2012년 문재인 후보 득표율(48.02%)이 엇비슷하다. 통합당으로선 한 번 더 기회를 얻은 셈이다.  
 
2012년 대선때 박근혜 후보는 당헌당규에서 ‘보수’를 지움으로써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니 ‘보수를 버려야 보수가 산다’는 건 이미 입증된 보수 집권전략 아닌가.
 
이정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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