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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빼러 왔다가…세계 최연소 5.14c 오른 초등생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 위로 옮긴다. 그가 올리던 바위는 굴러떨어진다. 이 과정이 되풀이된다. 시시포스는 육체의 고초를 겪는 게 아니다. 무한 반복이라는, 정신의 나락이다.
이학진군이 지난 13일 일산클라이밍 센터에서 연습하고 있다. 이 선수는 2월 초 태국의 '그리드' 루트를 올라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로 5.14c코스를 완등하는 기록을 세웠다. 김현동 기자

이학진군이 지난 13일 일산클라이밍 센터에서 연습하고 있다. 이 선수는 2월 초 태국의 '그리드' 루트를 올라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로 5.14c코스를 완등하는 기록을 세웠다. 김현동 기자

초등학생 이학진군은 추락을 반복했다. 지난 1월 18일부터 2월 2일까지, 태국 레일리 비치에 있는 ‘그리드(greed·루트 이름)’ 루트를 20여 차례 도전했다. 다이노(dyno, 몸을 날려 홀드를 잡는 동작)를 시도하다가 10m 넘게 떨어졌다. 발이 터지면서 8m 허공을 갈랐다. 이렇게 40여 회 추락했다.

■ 13세 클라이머 이학진
만 12세인 지난 2월 태국 '그리드' 완등
앞으로 기울어진 건물 외벽 오르는 난도
"라면·자장면은 천적" 음식 철저히 가려


 
33m의 이 루트는 석회암질의 난도 5.14c다. 이 그리드를 경험해 본 경력 20년의 한 클라이머는 “클라이밍에서 곧추선 바위 면이 반반해서 ‘거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리드가 바로 그런 곳”이라고 했다. 최석문(47·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씨는 “5.14c는 한쪽 팔, 한 손가락만 사용해 턱걸이할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한다”며 “손톱 반만 한 돌기만 잡고 디디며 아파트 18층, 그것도 20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진 곳을 오르는 어려움”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무엇보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클라이머들도 수년간 공들여 이 그리드를 추락 없이 오르고자 해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요세미티 십진법 체계로 본 암벽 난도

요세미티 십진법 체계로 본 암벽 난도

22번째 등반, 이학진군은 어느 곳에선 한쪽 발을 허공에 버리고, 때론 몸을 100도 비틀고, 간혹 손으로 앞 홀드를 스치듯 건드리며 위의 홀드를 잡았다. 두 곳에서는 몸을 날렸다. 모두 성공했다. 마지막 고빗사위, 머리 위에서 땅을 향해 자란 종유석들이 손짓하는 듯했다. 철컥, 자신의 안전벨트에 매달린 로프를 종료 지점에 걸었다. 33m 밑 '지상'에서 지켜본 세계 클라이머 50여 명이 환호했다. 그는 이 루트를 두 번 더 오른 뒤 귀국했다.
이학진군이 지난 2월 초 태국의 '그리드' 루트를 등반하고 있다. 이군의 트레이닝 코치인 한만규 일산클라이밍 센터장은 "학진이가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에 암벽 난도 5.14c 등반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한만규]

이학진군이 지난 2월 초 태국의 '그리드' 루트를 등반하고 있다. 이군의 트레이닝 코치인 한만규 일산클라이밍 센터장은 "학진이가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에 암벽 난도 5.14c 등반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한만규]

이군의 트레이닝 코치인 한만규(61·일산클라이밍 센터장)씨는 “학진이는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에 5.14c 등반에 성공한 것”이라며 “5.14c는 스포츠클라이밍 세계 챔피언인 아담 온드라(체코·27)도 14살에야 완등했고, 월드컵 챔피언인 알렉스 메고스(독일·27)도 13살에 올랐다”고 밝혔다. 한만규 센터장은 이군이 5.13b 이상 오르는 세계 클라이머들의 기록 사이트인 8a.nu에도 올랐다고 말했다. 이군은 귀국 후 2주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지난 20일 일산클라이밍 센터에서 이제 갓 중학교(인천 안남중)에 들어간, 얼굴에 여드름이 피기 시작한 앳된 ‘아이’ 이군을 만났다. 
이학진군은 2월 초 태국의 '그리드' 루트를 올라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로 5.14c코스를 완등하는 기록을 세웠다. 지난 13일 일산클라이밍 센터에서 연습하고 있는 이군의 표정이 날카롭다. 김현동 기자

이학진군은 2월 초 태국의 '그리드' 루트를 올라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로 5.14c코스를 완등하는 기록을 세웠다. 지난 13일 일산클라이밍 센터에서 연습하고 있는 이군의 표정이 날카롭다. 김현동 기자

 
그리드 완등 후 울었다는데.
하강하자마자 엄마와 통화했어요. 엄마가 등반 그만하고 먹고 싶은 것 실컷 먹으라 하더라고요. 그때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태국 현지에 가서 열흘간 5㎏ 뺐거든요. 망고찹쌀스테이크가 메뉴로 나온 적이 있는데, 망고는 달아서 안 먹었고 찹쌀 입힌 스테이크만 살짝 떼어먹었어요. 이런 식으로 제가 알아서 식단 관리를 했어요.엄마 목소리 들으니 그냥 눈물이 났어요. 제가 좀 잘 울어서….
 
외국 클라이머들이 12세가 1m 70cm, 50㎏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그새 만 13세가 됐고 2~3cm 더 컸어요(웃음). 어른들이 내게 출생신고 늦게 한 거 아니냐고 농담해요. 반에서는 나보다 큰 애들도 꽤 있는데…. 키에 비해 체중이 덜 나가 외국인들이 제 나이와 키를 더 의심하는 것 같기도 해요.
이학진군이 지난 13일 일산클라이밍 센터에서 굳은살 박힌 손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최연소(12세)로 5.14c 코스를 완등한 이군은 바위에서 내려오면 영락없는 '아이'다. 김현동 기자

이학진군이 지난 13일 일산클라이밍 센터에서 굳은살 박힌 손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최연소(12세)로 5.14c 코스를 완등한 이군은 바위에서 내려오면 영락없는 '아이'다. 김현동 기자

8a.nu 사이트에는 이 군의 신체를 놓고 댓글이 쏟아졌다. 심지어 우리나라 통계청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한국 청소년 평균 신장' 그래픽까지 제시한 외국인도 있었다. 키를 걸고 넘어졌지만, 만 12세가 15.4c를 완등했다는 걸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2~3년 전 사진 속 이군은 꽤 통통했다. 어머니 박진애(42)씨는 “아이가 미니어처 만들기를 좋아해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걱정될 정도로 살이 붙더라"며 "성격이 위축되는 것 같기도 해서 매달리기라도 시켜 보려고 클라이밍센터를 찾았고 본격 훈련은 지난 2월 기준 14개월째였다”고 말했다. 
 
한만규 센터장은 “학진이가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본인 스스로 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싶은 게 많은 나이지만 꾹 참는다는 말이다. 이군은 “클라이밍을 시작하기 전에는 키 1m 30cm인데 체중은 50㎏이 넘었다”고 말했다.
 
라면·자장면·떡볶이 등 먹고 싶은 게 많을 텐데.
라면과 자장면은 나의 천적이에요. 클라이밍 시작한 뒤로 잘 안 먹어요. 떡볶이는…. 음, 좀 당기기는 해요(웃음).
이학진군이 지난 13일 일산클라이밍 센터에서 훈련 도중 홀드 세팅에 쓰는 사다리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선수는 세계 최연소(12세)로 5.14c 코스를 완등했다. 김현동 기자

이학진군이 지난 13일 일산클라이밍 센터에서 훈련 도중 홀드 세팅에 쓰는 사다리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선수는 세계 최연소(12세)로 5.14c 코스를 완등했다. 김현동 기자

 
그는 아침에 손바닥 반만한 고기 한 토막 먹은 뒤 클라이밍센터에서 오후 늦게까지 강냉이 몇 알만 먹었다. 이쯤 되면 고난의 행군 아닐까. 어머니 박씨는 “분명 힘들 것 같은데 남편과 눈여겨봐도 학진이가 힘들다고 한 적도, 내색을 한 적도 없었다”며 “클라이밍을 하는 즐거움이 더 큰 것 같다”고 했다. 이군은 영국의 유명 등반가 더그 스콧(79)이 말한 "배가 부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을 깨친 것일까. 
 
이군은 이날도 한만규 센터장의 과제를 착실히 수행했다. 그는 일주일에 세 차례 6시간씩 훈련한다. 주말에는 자연 바위를 찾는다.
 
어린 나이지만, 등반 철학이 있을텐데. 
겸손해야 할 것 같아요. 암장에서나, 바위에서나. 그리고 등반하시는 선배님들이 많으니, 인사를 잘해야 하고요. 일상이나 등반 관련해서 꼼꼼히 기록하는 습관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군은 이날 훈련 중 자신이 어떻게, 얼마나 했는지를 매번 수첩에 적었다. 그리고 짧은 평을 그 옆에 적었다. 한만규 센터장의 훈련법 중 하나다. 
  
첫 해외 등반에서 5.14c 완등인데, 등반 신동 아닌가.
음, 그 말은 좀…. 제가 신동은 아닌 것 같아요. 신동이라면 세계 최고 난도인 5.15d를 오른 아담 온드라나, 요세미티 엘캐피탄을 로프 없이 등반하는 알렉스 호널드 그런 사람 말하는 것 아닌가요(웃음).
 
한만규 센터장은 “학진이는 아쉽게도 선천적인 자질은 없는 편으로 100%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며 "선천적 자질이 없다는 건 어쩌면 더 노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학진군이 지난 2월 초 태국의 '그리드' 루트를 등반하고 있다. 이군의 트레이닝 코치인 한만규 일산클라이밍 센터장은 "학진이가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에 암벽 난도 5.14c 등반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한만규]

이학진군이 지난 2월 초 태국의 '그리드' 루트를 등반하고 있다. 이군의 트레이닝 코치인 한만규 일산클라이밍 센터장은 "학진이가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에 암벽 난도 5.14c 등반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한만규]

 
같은 암장의 ‘형님’인 이강륜(17)군도 2년 전에 5.14c를 완등했다. 아시아 최연소였다. 12세 동갑 송윤찬군도 지난해 5.14급을 완등했다. 세 명은 2024년 파리 올림픽을 바라보고 있다. 한만규 센터장은 “굳건한 의지와 자기관리가 있어야 하고, 치명적 부상은 없어야 한다"며 "가장 쉬운 숙제이면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시시포스는 오늘도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옮기다 떨어뜨리고 있다. ‘반복’이라는 고통을 고통으로 알고 이를 넘으려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다. 이제 만 13세. 이학진군은 시시포스로 살지, 이를 거부할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그는 다시 홀드의 난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셋이 함께 올림픽 나가고 싶은데, 남자 티켓이 2장뿐이라 어쩌죠?”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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