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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칼럼] 다양성의 ‘시대정신’과 새로운 정치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독일의 역사철학자 요한 고트프리드 헤르더가 1769년에 처음 사용한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말은 특정한 시기에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행위를 이끌어내는 문화적 동질성을 의미한다. 영국 노팅험 대학의 마이케 왜르겔(Maike Oergel)교수가 작년에 출간한 『시대정신: 어떻게 이념은 움직이는가?』를 보면 시대정신에는 세 가지 요소가 강조된다. 사회적 영향력, 넓은 의미의 문화, 일체감 형성이 바로 그것이다. 한 사회에서 그 시대에 나타난 사상, 태도, 노력, 충동, 생명력의 총합이 “시대정신”이라고 헤르더는 이야기했다. 이런 시대정신은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원인과 결과를 잘 설명해준다.
 

우파보수, 좌파보수만 남은 정치
과거 기적 기댄 낡은 정치 버려야
‘비동시성의 동시성’ 시대를 맞아
다양성의 시대정신 주목해야 한다

21대 총선이 끝났다. 여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이번 총선은 양대 정당이 지지층을 결집하여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만을 앞세운 정략적 선거가 되고 말았다. 미래를 향한 비전 제시보다는 정권심판, 야권심판 등 과거에 대한 네거티브 선거와 부정적 프레임 씌우기로 선거가 치뤄졌다. 지지층들은 필사적이었지만 중도층 유권자들은 선택을 주저했고, 결국 그들은 최선보다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참패한 야당뿐 아니라 완승한 여당도 유권자들이 선택해 준 미지의 길을 이제부터 어떻게 가야하나 라는 심각한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로 선거분위기가 바뀌었다는 핑계만으로 보수야당의 궤멸현상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사법개혁과 조국수호의 명분만으로 유권자들이 여당을 지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20대 국회를 지켜보면서 정치가 삼류라는 비난이 거셌다. 여야뿐 아니라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의 정치적 역량에 국민들은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한다. 정치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하고 시대정신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20대 국회는 이런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오늘 우리 정치에 이념과 철학은 보이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것도 무의미하다. 표만 보이면 보수정당도 자유시장 원칙을 기꺼이 포기하고 진보정당도 혁신적 변화에 종종 눈을 감는다. 보수라는 가치를 수구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우리 정치에는 현실적 이해만 추구하며 미래를 외면하는 우파보수와 좌파보수만 존재한다.
 
이번 선거를 통해 우파보수가 먼저 궤멸되는 심판을 받았다. 좌파보수도 그 자리에 안주하면 언제 궤멸될지 모른다. 이미 선거과정에서 586세대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룩한 경제 성장과 정치 민주화라는 두 가지 기적에 기대어 국민들의 감성만 자극하는 정치는 이제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그 당시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 1960년대 보릿고개를 겪으며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우리는 정신없이 달려왔다. 1980년대 오랜 군사독재의 올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온몸으로 민주화 투쟁을 했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눈물겨운 시대정신의 열망을 이끌어내 국민들과 함께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제 또 다른 시대정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세월호 사태와 최순실 사건으로 촉발된 촛불혁명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권위주의 해체를 염원하는 젊은 층과 중산층이 주도한 또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 미투운동,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등 새로운 시대정신이 용솟음치고 있다. 기업에서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하고 대학에서 창업을 이야기하는 뉴노멀의 새로운 가치가 곳곳에서 등장한다. 젊은 세대, 수도권의 중도층이 갈망하는 시대정신도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인은 더 이상 20세기의 한국인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경제선진국의 한국인으로서 사업으로, 유학으로, 관광으로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세계시민이 되었고, 민주화를 통해 철저히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자유인이 되었다. 세대, 소득, 지역에 따라 엄청나게 인식의 차이가 큰 다층적 사회가 되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외국인보다 더 먼 이방인으로 여긴다. 인식이 전혀 다른 세대가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청년실업, 고령화, 저출산, 교육불평등, 양극화 등 풀어야 하는 문제가 산적해 있다. 오늘 우리는 더 많은 가능성을 지녔지만 더 큰 불안을 느끼는 모순에 빠져있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 민주화와 같은 과거의 획일화된 시대정신이 아니라 더 다양해진 새로운 시대정신에 주목해야 한다.
 
이제 과거는 잊어야 한다. 과거를 끝없이 반추하는 정치도 버려야 한다. 유권자들을 양극단으로 내몰고 지역색에만 의존하는 낡은 정치는 끝내야 한다. 젊은 층과 수도권 민심에서 깊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읽어내야 한다. 열렬 지지자들 보다는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중도층의 시대정신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심연에서 급변하고 있는 다양한 시대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느 정당도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신뢰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새로운 정치를 하려면 캐스팅 보트는 언제나 가변적이라는 사실부터 가슴에 새겨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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